21. 높이의 끝에서 마주한 시시한 행복

아버지가 경고한 바람, 그리고 안온한 실내

by 아를밤

이수의 생일 당일, 두 사람은 저녁 식사 장소로 가기 전 이수 부모님의 식당에 잠시 들렀다. 정장 차림의 도진과 모처럼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이수를 보며 어머니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아이고, 우리 이수 오늘 정말 예쁘네! 도진 씨, 우리 딸 잘 부탁해요. 이수 아빠, 당신도 한마디 해줘요."

주방 입구에서 수건을 털던 아버지는 두 사람의 차림새를 한 번 쓱 훑더니, 짧은 헛기침과 함께 입을 뗐다.

"고층은 바람이 세다더라. 감기 걸리지 마라."

뜬금없는 걱정에 이수가 웃음을 터뜨리며 가방을 고쳐 멨다.

"아빠, 바람이 세도 건물 안이라 바람 하나도 안 들어와요. 걱정 마."

아버지는 "어, 그래. 가 봐라" 하고는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지만, 그 덤덤한 뒷모습 뒤로 남겨진 말은 이수의 귓가에 묘하게 맴돌았다.


5월의 공기는 적당히 달큼했고, 잠실의 랜드마크인 그 거대한 빌딩은 저녁 노을을 받아 은빛으로 번뜩였다. 이수는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혹은 아이들과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습관처럼 그 빌딩의 끝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곳은 이수에게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언젠가 여자로 대접받는 날이 오면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오늘, 도진의 손을 잡고 그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이수의 심장은 555미터의 높이만큼이나 가파르게 뛰었다.

"자기야, 나 여기 진짜 와보고 싶었어. 근데 막상 올라가려니까 좀 떨리네."

"떨릴 거 없어. 밥 먹으러 가는 건데 뭐. 가자, 우리 서이수 생일 축하하러."

귀가 먹먹해지는 속도로 치솟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서울 전체를 발아래 둔 스카이라운지의 화려한 전경이었다.


통유리 너머로 촘촘히 박힌 불빛들이 보석처럼 빛났고,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 위에는 은은한 촛불이 일렁였다. 도진이 미리 예약해둔 창가 자리. 이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한강은 가느다란 띠 같았고, 도로는 붉은 혈관처럼 보였다. 드디어 동경하던 자리에 앉았다는 고양감이 이수를 감쌌다.

하지만 그 고양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스로 나오는 음식들은 지나치게 정갈해 오히려 감질맛이 났고, 옆 테이블과의 간격은 생각보다 좁아 옆 사람의 웃음소리가 이쪽의 대화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야경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정적인, 그냥 '아주 높은 곳에서 보는 불빛 더미'일 뿐이었다.

스테이크를 썰던 이수가 문득 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도진은 이수의 표정을 살피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야, 왜 그래? 음식 마음에 안 들어?"

이수는 포크로 고기 한 점을 들어 올려 보이며 속삭였다.

"자기야... 이거 혹시 샘플이야?"

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아니, 내가 알던 스테이크는 좀 더... 덩치가 있었거든."

도진이 참다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555미터잖아. 고기도 고소공포증 있어서 크게 못 올라온 거 아니야?"

이수가 킥, 웃음을 흘렸다.

"아 그래서 이렇게 얌전해? 콩알만 하게?"

잠깐 옆 테이블을 흘끗 보더니 이수가 다시 속삭였다.

"그리고 저기 커플... 우리 대화 다 들을 것 같은데?"

"괜찮아. 우리 얘기 재미없어. 고기 작다는 얘기뿐이잖아."

둘은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도진은 웃고있는 이수를 바라보며 말한다.

“자기, 이렇게 웃고 있는 거 보니까 나 좀 안심된다.”

야경을 바라보던 이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진으로 볼 땐 엄청 반짝였는데..."

"지금은?"

"음... 그냥... 불 켜진 점들?"

도진이 따라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네. 확대 안 되는 스마트폰 화면 같네."

"맞아. 확대하려고 손가락 벌려도 안 커지는 느낌."

둘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나 여기 꼭 와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와봤잖아."

"응. 와보니까... 별거 아니네."

잠깐 멈췄다가, 부드럽게.

"근데 다행이야. 이제 안 궁금해."

"왜?"

"별거 아니라는 걸 같이 확인했잖아."

잠깐 멈췄다가,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나 여기 올려다보면서 괜히 기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아. 그냥... 고기 작은 데구나, 이러면 되잖아."

도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잡았다.

"다음 생일엔 어디 갈래?"

"편의점."

"또?"

"거긴 고기 대신 삼각김밥이라도 크잖아."

둘은 또 한 번 소리 죽여 웃었다.

두 사람은 화려한 라운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킥킥거리며 웃음을 나눴다. 아버지가 걱정했던 '센 바람'은 건물 밖에서 웅웅거리고 있었겠지만, 정작 건물 안 이들의 테이블 위엔 시시한 농담과 따뜻한 웃음만이 흘렀다. 긴장했던 이수의 어깨가 그제야 편안하게 내려앉았다.


이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복해야 할 목표'처럼 보이던 서울의 야경이 이제는 그저 평범한 풍경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원했던 건 이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도진의 마음이었다는 걸.

"나 여기 꼭 와보고 싶었거든. 왠지 여기 앉아 있으면 내가 진짜 대단한 여자가 된 것 같을 줄 알았어."

"그래서, 와보니까 어때? 대단한 여자 된 것 같아?"

"아니. 그냥 별거 없어. 근데... 와서 다행이야."

이수가 도진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라는 걸 같이 알게 된 사람이 자기라서 좋아. 이제 더 이상 올려다보면서 동경하지 않아도 되잖아."

엘리베이터가 다시 지상을 향해 하강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아버지가 예고했던 대로 매서운 밤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도진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이수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도진은 차를 몰아 아파트단지 편의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작은 쇼핑백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거... 아까 그 높은 데서 주려고 했는데, 거기선 왠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투박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지갑과, 그 안에 꽂힌 아이들의 사진이 담긴 폴라로이드 한 장이 있었다. 대부도에서 다연과 다은, 도진의 아이들이 뒤섞여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자기야, 나 오늘 진짜 생일 선물 받은 기분이야. 그 높은 데서 '별거 아니네'라고 같이 말해준 게 진짜 선물이었어. 덕분에 이제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됐거든."

도진은 말없이 이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555미터 상공의 화려함보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서 나누던 농담과 진심이 더 뜨거웠다. 이수는 처음으로, 올려다보던 곳을 웃으며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동경하던 높이에 올라서고서야 깨닫는다. 아득한 불빛더미보다 나를 더 깊게 안아주는 것은 곁에 앉은 시시한 농담과 옅은 온기였다는 것을.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견고한 실내보다, 내 어깨를 감싸는 투박한 외투 한 벌이면 충분하다. 닿지 못할 풍경을 올려다보던 고개는 이제 비로소 땅을 딛고 평온을 찾는다.
“별거 아니라는 걸 같이 알게 된 사람이 당신이라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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