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배우는 중
5월의 바람이 지나가고, 계절은 한 번 더 기울어 있었다. 민속촌에서 여섯으로 걷기 시작한 날 이후로 여러 번 함께 밥을 먹고, 여러 번 함께 아이들을 재웠다. 그렇게 몇 번의 저녁이 지나자, 우리는 어느새 여름휴가를 함께 계획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목적지는 가평, 쁘띠프랑스와 키즈펜션. 여름은 우리를 또 한 번 시험하려는 듯 뜨겁게 기다리고 있었다.
8월의 공기는 숨이 막힐 만큼 무거웠지만, 여섯 명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가평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이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처럼 떠들어댔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이국적인 건물들이 늘어선 쁘띠프랑스. 피노키오와 어린왕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동화 같은 풍경 속 마을에서 여섯 명은 짐짓 평화로운 휴가를 시작했다.
어린왕자 탈을 쓴 직원이 사탕을 나눠주고, 제페토 할아버지 공방에서는 나무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인형극을 보며 숨을 죽였고, 극이 끝날 무렵에는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 동화 같은 배경 뒤로, 아주 사소하고도 날카로운 균열이 시작되었다.
“엄마, 나 우동 먹고 싶어.”
다은의 말은 단순했다. 그 아이는 우동을 좋아한다. 면을 끝까지 후루룩 먹으며 남기지 않는 아이. 하지만 도진의 눈에는 우동집이 보이지 않았다. 돈가스와 핫도그 간판만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우동 안 파는 것 같은데? 저기 핫도그 먹자.”
다은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돈까스 안 좋아하는데... 우동먹고 싶어.”
도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사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사주란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고집’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사실 다은은 이유없이 우긴 것은 아니었다. 방금 지나쳐온 골목옆에서 우동 그림을 봤었다. 본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모르는 도진의 오해는 소리 없이 쌓여갔다.
"있으면, 사줬겠지. 계속 왜 그래?"
이수는 다은의 손을 잡고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 씩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다독였지만, 두 모녀의 마음엔 이미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삼촌이, 못 봐서 그래. 엄마가 이야기해 줄게."
다은은 자주 오해를 받는다. 어디서든 기죽지 않고 제 감정을 다 말한다는 이유로, 욕심 많고 상처도 잘 받지 않는 아이라고 쉽게 판단된다.
강한 아이로 오해받는 아이는, 울 기회조차 빼앗긴다는 사실이 이수의 가슴을 찔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오해가 도진에게서 나왔다. 상처받은 아이보다, 그 사실이 더 아팠다.
이수는 조심스럽게 도진에게 다가갔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다.
"자기야, 내가 아까 저쪽 지나면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지만, 한 번만 같이 가봐 줄래?"
도진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며, 최대한 가볍게 다시 걸어갔다. 이수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 도진의 눈앞에 정말로 우동 가게가 나타났다. 도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나 도진의 실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양이 적은 자신의 딸 서윤만을 키우며 쌓아온 경험이라는 편견에 갇혀 있었다.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는 대신, 도진은 말했다.
"서윤이도 우동 먹고 싶다니 잘됐네, 둘이 하나 시켜서 나눠 먹으면 되겠다."
그에게는 익숙한 계산이었다. 평소 양이 적은 서윤을 기준으로 생각한 판단. 다은이 혼자서 한 그릇을 다 먹는 아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 몰랐다. 다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누어 먹은 우동은 다은에겐 부족했다. 면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도진은 다은의 빈 그릇을 한 번, 서윤의 남은 면발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김이 오르는 우동 한 그릇이 다시 다은 앞에 놓였다.
“다은아. 이건 네 거야. 남으면 아빠가 먹을게. 아니, 삼촌이 먹을게."
설명보다 강한 행동이었다. 다은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늦게나마 놓인 온전한 우동 한 그릇 앞에서 다은의 서러움이 조금은 녹아내렸지만, 이수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수는 도진을 나무랄 수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에 오히려 다은이가 더 안쓰러웠다. 만약 성격이 반대인 첫째 다연이가 같은 행동을 했다면 도진은 오해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수는 도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타인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다은이 편에 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아이들과 함께 서야 할 사람이었다. 다은이는 나의 딸이지만, 아직은 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오늘처럼 또렷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여섯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같은 속도로 배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이수는 알게 되었다. 내 아이를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변호하지는 못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엄마, 여기 맛있다. 다음에 또 오자.”
도진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여름은 뜨거웠다. 사랑은 완성형이 아니라, 매번 다시 주문해야 하는 한 그릇 같았다.
쁘띠프랑스를 나올 때쯤, 해는 가장 높이 떠 있었다. 차 안은 잠깐 조용했다. 아이들은 지쳤고, 어른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두 번째 목적지는 가평의 키즈펜션.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의 함성이 먼저 터졌다. 거실 한쪽은 작은 키즈카페처럼 꾸며져 있었고, 알록달록한 공과 미끄럼틀, 트램펄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와아아아!”
여섯 명 중 네 명이 동시에 신발을 벗어 던졌다. 아이들은 수영장에 몸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튜브를 끼고 물장구를 치는 소리, 누가 더 멀리 튀기나 경쟁하는 소리, “아빠! 엄마! 여기 봐!” 외치는 목소리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다은은 물속에서도 씩씩했다. 쁘띠프랑스에서의 서운함이 거짓말처럼, 얼굴에 물을 맞으면서도 깔깔 웃었다. 도진은 그런 다은을 몇 번이고 바라봤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물에서 나온 아이들은 젖은 몸 위에 수건을 둘러쓰고도 또 뛰어다녔다. 펜션 내부는 마치 거대한 놀이터 같았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폐장 시간이 없는 키즈카페 같은 방 안을 종횡무진 누볐다. 펜션 안은 금세 작은 놀이동산이 되었다.
저녁이 되고, 배불리 먹고, 샤워까지 마쳤을 때쯤. 우리는 아이들을 침대로 유도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우리 여기서 잘래!”
놀이방 천장에 설치된 커다란 그물망. 마치 비밀기지처럼 보이는 그 공간 위로 네 아이가 차례로 기어 올라갔다.
“엄마! 여기 완전 구름 같아!”
침대는 텅 비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물망 위에 옹기종기 모여 누웠다. 속닥속닥, 낄낄거리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결국 도진과 이수는 허락했다. 불을 끄고 방문을 닫았을 때도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은 침대가 아니라, 모험 위에서 찾아오는 것 같았다.
조금 서툴렀지만, 그물망 위에서 겹쳐진 아이들의 꿈처럼 우리는 여전히 함께였다.
도진과 이수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 하루 종일 쏟아낸 감정들, 그리고 조용해진 밤. 도진이 먼저 말했다.
“나 오늘... 좀 성급했지.”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다 배우는 중이잖아.”
그는 한숨처럼 웃었다.
“다은이 생각보다 우동 진짜 잘 먹더라.”
“응. 걔는 생각보다 많이 먹고, 많은 걸 혼자 해.”
잠시 침묵이 흘렀고 도진이 작게 이야기했다.
“나도... 배우고 싶어. 다은이.”
그 말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은 이미 서로에게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물망 위에서 네 개의 숨소리가 고르게 섞였다. 여섯이라는 숫자는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누구도 혼자가 아니었다. 도진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자기한테 상처 주는 사람은… 그게 나라도 싫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며 휘청이는 오후, 내 아이의 서러움을 타인의 눈으로 읽어낼 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다. 사랑은 단숨에 완성되는 풍경이 아니라, 덜 익은 마음을 매번 다시 끓여내며 온기를 맞추어가는 긴 과정임을 깨닫는다. 아직은 서툰 그림자들을 나란히 포개어 눕히고, 조용히 내일을 기약하며 깊은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