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함께라는 숫자의 무게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은, 온전한 여섯 명의 하루

by 아를밤
연둣빛이 짙어지는 5월, 바람에도 다정한 무게가 실렸다.

우리는 여섯 명이 되었다. 어린이날의 민속촌으로 향하는 길, 이제 아이들에게서 처음의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리는 정체 속에서도 차 안은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지루함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좁은 차 안을 채울수록, 운전대를 잡은 도진의 어깨와 조수석에 앉은 이수의 눈가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았다.

결국 주차장을 코앞에 두고 차 흐름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화장실 급해요!"

"아빠! 나도!"

"엄마. 화장실 멀었어?"

아이들의 아우성에 이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도진에게 주차를 맡긴 채, 네 아이의 손을 나누어 잡고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화장실 미션을 완수한 뒤 마주한 민속촌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도착한 민속촌의 열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각각 짝을 지어 걷기 시작했다. 열한 살 다연이는 일곱 살 도윤이의 손을 듬직하게 잡았고, 열 살 다은이는 아홉 살 서윤이의 손을 꼭 쥐었다.


"누나, 저기 솜사탕!"

"도윤아, 누나 손 놓치면 안 돼!"

솜사탕 하나를 사기 위해 수십 분을 기다려야 했다. 5월의 햇살은 어느덧 정오를 지나며 뜨거운 열기로 변했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사려 해도 10분 넘게 줄을 서야 하는 고단한 일정이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엔 짜증 대신 설렘이 가득했다. 땀방울이 맺힌 아이들의 뺨과 입가에 묻은 솜사탕 조각들.

이수는 그 시시하고도 평범한 풍경을 보며 안의 숫자를 다시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들, 그리고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어른들. 오늘은 유난히 서로를 더 자주 확인하는 날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축제지만, 어른에게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날. 나는 오늘도 아이들의 등을 세 번은 더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잠깐, 숫자가 어긋났다.

"도, 도윤아! 도윤아!"

순식간에 이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인파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 사이로 막내의 작은 뒤통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요동치고 숨이 가빠지는 전조가 느껴지려던 찰나, 도진이 이수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는 당황하는 대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강도윤! 어디 갔냐! 아빠 여기 있다!!"

큰 외침 후, 도진은 이수에게 낮게 이야기했다.

“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내가 더 잘 봤어야 했는데.”

커다란 외침이 이정표라도 된 듯, 지나쳐온 골목 너머에서 '다다닥' 발소리가 들려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온 도윤이 도진의 다리를 덥석 안았다.

"너 그러다 아빠 잃어 버리면, 저기 민속촌 거지 아저씨 집에서 살아야해."

"아빠! 나 다른 아저씨가 아빤줄 알았어!"

도진은 아이를 혼내기보다 엉덩이를 툭툭 털어주며 웃었다. 이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도진의 그 투박한 외침이 자신까지 구원했음을 깨달았다. 길을 잃어도 돌아올 목소리가 있다는 것. 그것은 이수가 평생 갈구해온 안도감이었다.


도윤을 찾고 나서도 한동안 이수의 심장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금세 다른 구경거리에 눈을 빛냈다. 그때였다.

“이놈들! 거기 서지 못할까!”

낯선 고함과 함께 갓을 쓴 포졸 하나가 장터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허리에 찬 목검이 덜컹거리며 아이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둑 잡아라! 떡 훔쳐간 놈들!”

순간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린 안 훔쳤어요!”
“도윤아 도망가!”

네 아이가 동시에 흩어졌다. 다연은 도윤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끌었고, 다은은 서윤을 밀치듯 앞세웠다. 그 작은 발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골목을 내달렸다.

“야, 같이 가!”
“누나 기다려!”

도진은 웃으며그 뒤를 따라 뛰었다. 이수도, 방금 전의 공포를 잊은 채 아이들을 향해 달렸다.

포졸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외쳤다.

“잡히면 곤장이다!”

아이들의 웃음이 장터를 가득 채웠다.

방금 전까지 ‘잃을까’ 두려웠던 발걸음이, 이제는 함께 뛰는 발걸음이 되었다.

놀이마당에 도착하자 다연과 다은이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바이킹으로 달려갔다. 서윤은 무서운 듯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언니들이 탄다는 말에 자꾸만 바이킹 주위를 맴돌았다.

"서윤아, 무서우면 안 타도 돼."

"이모... 무서운데, 나도 타고 싶어."

이수의 말에 서윤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도 언니들이랑 타고싶은데... 근데 혼자는 무서워."

이수에게도 그랬다. 바이킹은 공황의 기억을 불러내는, 여전히 넘기 힘든 산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윤의 불안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건, 내 손도 잡혀 있다는 뜻이니까.

"이모랑 같이 탈까? 이모가 옆에 있을게."

바이킹이 하늘로 치솟을 때마다 이수는 서윤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윤의 작은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맞잡았다. 용감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도망치지도 않았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괜찮아, 서윤아. 이모 여기 있어. 눈 감아도 돼. 금방 내려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건네는 위로는 서윤을 위한 것이자, 스스로를 향한 주문이었다. 바이킹이 멈췄을 때, 이수는 땀 범벅이 된 채 내렸지만 서윤은 "이모 덕분에 하나도 안 무서웠어!"라며 환하게 웃었다. 도진은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비틀거리는 이수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주었다.


민속촌의 긴 그림자가 발밑까지 길게 내려앉고,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솜사탕의 끈적함과 뜨거운 햇살에 지친 아이들을 보며 이수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도진을 돌아보았다.

"자기야, 우리 오늘 저녁... 우리 엄마 식당으로 다 같이 갈까?"

도진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수는 조금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들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이수의 제안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였다. 부모님의 식당으로 도진과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일. 그것은 이수가 스스로 쌓아 올린 성벽을 완전히 허물고, '우리'라는 보폭 안에 부모님까지 정식으로 초대하겠다는 가장 적극적인 선언이었다.

도진은 짐짓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보여드리고. 어쨌거나 우리가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게 가장 좋잖아. 마음의 거리라는 게, 자주 봐야 좁혀지는 거니까."

도진의 대답은 사려 깊었다. 이수는 도진의 그 투박한 진심이 고마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소란스러운 날, 가장 시끄러운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의 삶으로 들어가는 일. 이수에게 또 하나의 단단한 약속이었다.


여행의 끝은 이수 어머니의 식당이었다. 여섯 명의 대가족이 자리를 잡자, 주방에서 나오던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이 복작거리는 것 좀 봐라. 얘들아, 할머니가 맛있는 거 잔뜩 해줄게!"

아이들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 오늘의 모험을 떠들었다. 도윤의 실종 사건부터 바이킹의 용기까지. 아버지는 구석 자리에서 묵묵히 수저를 놓아주며,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이야기를 배경 음악 삼아 도진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수고했다."

그 안에는 어떤 말보다 깊은 안심이 고여 있었다. 우리는 숟가락을 들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반찬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아버지가 내어준 좁지만 단단한 자리. 이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완벽한 하루는 사고가 없는 날이 아니라, 사고를 함께 수습하고 돌아와 마주 앉을 식탁이 있는 날이라는 것을. 흙먼지 묻은 신발과 발그레한 아이들의 뺨이 오늘 우리가 함께 건너온 산의 증거였다.

오늘은 아무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여섯 명 그대로였다.



잃어버릴까 두려워 발을 굴리던 소란 속에서, 기어이 서로의 손을 다시 찾아 쥐는 단단한 감각을 배운다. 완벽한 하루는 사고가 없는 날이 아니라, 흩어졌던 마음들이 다시 한 식탁으로 모여앉는 안온함에 있음을 깨닫는다. 함께라는 숫자의 무게가 나를 지탱하는 가장 묵직한 사랑으로 남는 저녁이다.

"아빠, 나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해?"


이전 21화21. 높이의 끝에서 마주한 시시한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