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를 넘어서는 신뢰의 온도
10월의 공기는 여름의 그것과는 달랐다. 습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서늘하고도 명료한 가을의 냄새가 차올랐다. 한글날 대체공휴일까지 이어진 3일간의 연휴. 세상은 휴식의 기대로 들썩였지만,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이수에게 연휴는 곧 '전쟁'을 의미했다.
아침 일찍부터 걸려오는 신상 물류 입고 전화에 이수는 안절부절못했다. 오늘따라 도진은 유난히 느긋했다. 그는 이수가 어젯밤 새벽까지 작성한 '아이들 케어 리스트'를 식탁 위에 둔 채, 아이들의 운동화 끈을 하나하나 고쳐 매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 적어둔 거 봤어? 아이들이 덥다고해서 찬거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까 조심하고... 아, 그리고 혹시라도 싸우면..."
"이수야."
도진이 허리를 펴고 웃으며 이수의 말을 끊었다.
"나 지금 애들 데리고 전쟁터 나가? 걱정하지 마. 내가 애들 군기 바짝 잡아서 다녀올게. 나 수색대 출신이야."
도진의 농담에도 이수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네 명이다. 그것도 성격도 식성도 제각각인 아이 넷을 남자 혼자 감당한다는 건, 이수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영역이었다. 결국 이수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다섯 사람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매장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여행길에 오르기 전, 도진이 향한 곳은 이수 부모님의 식당이었다. 이수는 바빠서 함께 오지 못했지만, 도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른들께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아이고, 도진이 왔어? 이 보물들을 혼자 다 데리고 어딜 가려고?"
주방에서 나오던 이수의 어머님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들을 맞이했다. 도진은 능청스럽게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다.
"어머니, 오늘은 제가 아이들 호위무사입니다. 아버님, 저녁에 돌아올때 빵 사올께요."
도진은 이수의 아버지와 짧은 악수를 나누고, 아이들이 먹을 간식 몇 가지를 건네받았다. 이수의 부모님은 도진이 아이들과 섞여 있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건 억지로 연출된 친밀함이 아니었다. 도진은 아이들의 소란을 소음으로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 평온한 뒷모습을 보며 이수의 부모님은 식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선택한 목적지는 곰 테마파크였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곰 조각상들이 늘어선 그곳에서, 도진은 이수가 짜준 빽빽한 시간표를 주머니 속에 접어 넣었다.
"자, 지금부터 대장은 나다. 근데 부대장은 너희들이야. 다연이가 서윤이 맡고, 다은이가 도윤이 챙겨. 서로 손 놓치면 대장한테 혼난다!"
도진의 방식은 '통제'가 아니라 '위임'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모래밭에 주저앉아 옷을 버려도 "재밌게 노네"라며 허허 웃었고, 아이들끼리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지면 판사처럼 판결을 내리는 대신 슬쩍 간식을 내밀며 분위기를 바꿨다.
점심시간, 도진은 지난여름의 '우동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지 않았다.
"여기 우동 네 그릇, 떡볶이 2인분, 김밥 두 줄, 그리고 돈가스도 하나 주세요."
양이 많지 않겠냐는 종업원의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애들이 보기보다 잘 먹거든요. 남으면 제가 다 먹습니다."
식탁 위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다은은 우동 한 그릇을 온전히 차지했고, 도윤은 도진이 잘라준 돈가스를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도진은 더 이상 자신의 경험에 갇혀 아이들을 재단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의 속도에 자신의 보폭을 맞추는 법을 이미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그 시각, 매장에서 정신없이 손님을 받던 이수는 틈날 때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매장 앞은 몰려든 손님들로 아수라장이었지만, 이수의 마음은 자꾸만 곰 테마파크로 향했다.
[애들 밥 먹었어?]
[막내 울지는 않아? 자기 많이 힘들지?]
불안이 섞인 문자들을 보내고 나서 한참 뒤, 도진에게서 답장 대신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 속에서 도진은 커다란 벤치에 앉아 있었고, 네 아이는 그의 양팔과 다리에 포도송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도윤은 도진의 어깨 위에서 낮잠이 들었고, 다연과 다은, 서윤이는 도진의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며 꺄르르 웃고 있었다. 사진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수의 팽팽했던 어깨가 그제야 툭, 하고 내려앉았다. 그건 이수가 단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경지의 육아였다. 완벽하게 준비하고 계획해야만 사고가 없을 거라 믿었던 이수의 세계가, 도진의 저 '대책 없는 편안함' 앞에서 무색해졌다.
아이들을 하나씩 씻기고 재운 뒤, 도진은 거실 불을 낮췄다. 방마다 고른 숨소리가 번졌다. 막내는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고, 둘째는 인형을 끌어안은 채 엎드려 있었다. 도진은 말없이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방문을 살짝 닫았다.
싱크대에는 작은 접시 몇 개와 컵이 남아 있었다. 그는 물을 틀어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집은 생각보다 어수선하지 않았다. 소란은 있었지만, 불안은 없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수였다.
“지금 끝났어... 애들은?”
피곤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다 자고있어. 오늘 하루 너무 잘 보냈나봐, 생각보다 일찍자네.”
잠시 정적.
“많이 힘들었지?”
도진은 웃었다.
“다음에도 할 수 있을거 같은데?”
전화기 너머로 작게 숨이 새어 나왔다. 그게 웃음인지 안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잠깐 나올래? 편의점.”
집 앞 편의점 형광등 불빛 아래, 두 사람 앞에 캔맥주 두 개가 놓였다. 10월의 밤바람이 이수의 피곤한 뺨을 기분 좋게 스쳤다.
"정말 힘들지 않았어? 혼자 넷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잖아."
이수가 캔맥주를 따며 물었다. 도진은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더니, 밤하늘을 보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냥. 애들끼리 잘 놀았어. 애들 네 명이라 네 배로 힘들 줄 알았어?"
도진이 이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네 배로 힘든게 아니라, 네 배로 웃었어. 애들이 자기들끼리 챙겨주고 노는 거 보고 있으니까, 아... 이게 진짜 사는 거구나 싶더라고."
이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매장 안에서 쌓였던 긴장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내일 아침은?”
“내가 먹여서 보낼게. 자기는 좀 쉬어.”
짧은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볍지 않았다.
도진의 목소리엔 어떤 장식도 없었다. 이수는 도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캔맥주의 차가움 속에서도 그의 손바닥은 유난히 따뜻했다.
그제야 알았다. 통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이 사람에게는 맡겨도 된다는 것.
통제해야만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수의 세계가 도진의 담백한 신뢰 앞에서 허물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어릴 적 소풍날 도시락을 싸주던 날이 떠올랐다. 말은 없었지만, 가방 속 반찬이 하나 더 들어 있던 날. 누군가 묵묵히 나를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안도였는지, 그때는 몰랐다.
가을밤의 소란이 잦아들고, 두 사람 사이에는 맥주 거품 같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어떤 폭풍이 와도 아이들과 이 식탁으로 돌아와 마주 앉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완벽하게 쥐고 있어야만 안전하다 믿었던 불안이, 타인의 무심하고도 단단한 등 뒤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내 몫의 통제를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풍경은, 빽빽한 계획표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찬란하다. 네 개의 웃음소리가 겹쳐지는 공기 속에 가만히 나의 긴장을 섞어 보내는 밤, 이제는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