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1월의 보령은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새하얀 세상과 차가운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보령에 위치한 소 방목장은 묵직하고 고소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거대한 우유 곽 모양의 건물이 서 있는 광활한 목장은 겨울의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지금부터 목장 견학을 시작합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투어가 시작되었다. 집채만 한 건초더미가 쌓인 창고를 지나 젖소들이 한가로이 되새김질하는 축사로 향하는 길. 여섯 명의 대가족은 단연 눈에 띄었다. 성인 둘에 아이 넷. 복작거리는 아이들이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목장의 풍경이 되었다.
여섯 명의 보폭은 이제 자석의 극이 맞물리듯 자연스러웠다. 이수는 막내 도윤의 목도리를 다시 여며주었고, 도진은 아이들의 장갑을 챙기며 소목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송아지들이 뿜어내는 하얀 입김이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견학은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갓 태어난 새끼 소들이 머무는 방을 지나,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씨수소와 드넓은 방목지까지 이어지는 동선은 꽤 길었다. 아이들은 커다란 소의 눈망울에 겁을 먹으면서도, 가이드가 나눠주는 건초를 받아 들고는 금세 눈을 반짝였다.
“와, 진짜 크다! 아빠, 저기 봐요! 진짜 큰 소가 있어요!”
도윤이 도진의 손을 끌며 소리쳤다. 도진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아 올려 소의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이수는 그 곁에서 다연과 다은, 서윤이의 건초 바구니를 챙겼다. 가이드는 아이들의 소란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건초 주기 체험이 한창일 무렵 이수와 도진을 보며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구, 애들이 어쩜 이렇게 올망종망 예뻐요. 아빠랑 엄마랑 다 같이 놀러 온 거예요?"
송아지에게 줄 여물을 챙겨주던 목장의 가이드가 웃으며 물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를 법도 한 순간이었다. 이수는 숨을 들이켜며 자신도 모르게 도진의 눈치를 보았다. 관계를 설명하려면 긴 문장이 필요했고, 그 문장은 언제나 '아직은'이라는 단어로 시작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네."
하지만 대답은 아이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다연과 다은, 그리고 서윤까지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어떤 부연 설명도, “사실은 삼촌이에요” 같은 군더더기 해설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엄마와 아빠’라는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라, 지금 곁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두 사람을 향한 가장 정직한 수용이었다.
이수는 가슴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긍정 앞에서 그녀가 세워둔 보이지 않는 벽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아이들의 '네'라는 한마디를 온전히 감당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이 무거운 호칭을 도진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당황하지도, 굳이 부정하지도 않은 채 가이드의 다음 안내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네, 애들이 송아지를 무척 좋아하네요. 건초는 이만큼씩 주면 되나요?"
도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백했다. 그는 아이들이 밖에서는 자신을 '아빠'로 긍정하면서도, 안에서는 여전히 '삼촌'이라 부르는 그 미묘한 거리를 굳이 좁히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관계란 이름 붙이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는 삶 그 자체라는 것을.
가이드는 씨수소가 있는 축사 앞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일반 소의 세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몸집. 검은 윤기가 도는 근육은 마치 조각해 놓은 듯 단단했고, 굵은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씨수소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일행을 응시했다.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이 축사 안의 찬 공기를 가를 때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마저 숨을 죽였다. 늘 여유롭던 도진조차 그 압도적인 야성 앞에 잠시 말을 잃고 넋을 놓았다.
"와, 아니. 저건 진짜 소가 아니라 무슨 신화 속에 나오는 짐승 같다."
도진이 나직하게 뱉은 감탄사는 이수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생명의 근원적인 힘을 응축해 놓은 듯한 그 거대한 생명체 앞에서, 여섯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 경이로운 순간을 공유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하나의 호흡으로 묶여 있었다.
“와... 진짜 크다.”
다은이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도진은 웃으며 아이들 앞에 자연스럽게 섰다.
“겁먹지 마. 얘도 그냥 밥 먹는 거야.”
씨수소의 묵직한 눈동자가 잠시 이쪽을 향했다가 다시 건초 더미로 향했다. 아이들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갓 태어난 송아지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보온등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몸들. 가이드는 조심스럽게 건초 한 움큼씩을 나눠주었다.
“자, 손바닥에 올려서 천천히 주세요. 갑자기 손 빼면 안 돼요.”
여섯 명의 가족은 유난히 분주했다. 건초가 네 묶음씩 오가고, 장갑 낀 손이 서로의 팔을 잡고, “나도! 나도!” 하는 외침이 연달아 터졌다.
“한 명씩. 줄 서.”
도진의 말은 엄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질서가 생겼다. 도윤이 건초를 내밀자, 송아지의 따뜻한 혀가 손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살짝 거칠었지만,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아빠! 느낌 이상해!”
아이의 웃음이 축사 안에 울렸다. 그 소리에 다른 관광객들까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진짜 대가족이네.”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엔 이수의 심장이 내려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복작거림 속에서 이상한 안정이 피어올랐다. 여섯 개의 그림자가 겨울 햇살 아래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이들 넷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튀어 오르다가도, 어느새 도진과 이수의 양옆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방목지로 이동하는 길, 아이들은 눈 위에 남은 얼음 조각을 발로 차며 뛰었다. 다연이 미끄러질 뻔하자 도진이 재빨리 팔을 잡았다.
“사방이 소똥이야, 조심해. 넘어지면 똥범벅되는거야.”
농담섞인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수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정의하지 않아도, 이미 작동하고 있는 어떤 질서.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자리. 가이드는 마지막으로 방목장의 가장 높은곳 울타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제안했다.
“여섯 분이세요? 가운데 서세요. 아이들 앞에 세우고요.”
여섯 명이 울타리 앞에 섰다. 아이 넷이 앞줄에서 웃고, 그 뒤에 도진과 이수가 섰다. 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으아! 소똥냄새!”
도진이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셔터 소리가 울렸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설명 없이도 하나였다.
방목장에서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다시 우유 곽 모양의 건물로 들어왔다. 통유리 너머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실내를 아늑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음 순서는 아이들이 가장 기다려온 ‘아이스크림 만들기’ 체험이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에 얼음과 굵은 소금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작은 볼을 올려 신선한 우유와 크림을 부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아이들이 달라붙어 거품기를 젓기 시작했다.
"자, 소금이랑 얼음이 만나면 온도가 영하로 뚝 떨어져요. 열심히 저어야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돼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번갈아 가며 거품기를 휘저었다. 하지만 액체였던 우유가 점성을 띄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팔이 금세 고단해졌다. 결국 마무리는 도진의 몫이었다. 도진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묵직해진 크림을 힘차게 쳐올렸다.
"우와, 아빠 팔근육 봐! 진짜 세다!"
서윤의 감탄에 도진이 짐짓 으쓱하며 속도를 높였다. 이수는 그 옆에서 튀어 오른 크림을 아이들의 얼굴에서 닦아내고, 차가운 볼을 붙잡고 있는 아이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액체였던 우유가 단단한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 그건 어쩌면 지금 이들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완성된 아이스크림은 신선하고 달콤했다. 갓 만든 아이스크림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아이들은 깔깔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은 고요했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이수는 룸미러를 통해 겹쳐져 잠든 네 명의 아이들을 보며 독백했다.
어른들이 ‘재혼’이니 ‘결합’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들을 고르며 주춤거리는 사이, 아이들은 이미 서로의 빈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무엇이라 부를지 결정하지 못했음에도, 세상은 이미 우리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서투른 어른들이 단어를 고르며 주춤거리는 사이, 맞잡은 손의 온기가 먼저 정답을 말해줍니다.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숨결이 되어 찬 바람 속에서도 단단하게 영글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