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만난 사랑은 짧은 것이 아니라 깊은 것이다
11월의 공기는 밀도가 높았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계절이 성큼 깊어졌음을 실감하게 하는 날씨. 롯데월드의 입구는 이미 겨울을 준비하는 전구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이들의 외투 지퍼를 올리고, 잃어버린 장갑을 찾느라 소란스러웠을 아침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도진과 이수, 단둘이었다.
"진짜 이거 입고 가야 해?"
도진이 톤이 낮은 하늘색 니트를 매만지며 쑥스러운 듯 물었다. 이수가 맞춘 시밀러룩이었다. 똑같은 커플티는 부끄러워 못 입겠다던 도진도, 이수가 정성껏 골라준 부드러운 질감의 니트와 톤을 맞춘 운동화가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도진은 괜히 중얼거렸다.
"아저씨 주책이라고 누가 욕하는 거 아냐?"
"누가 봐도 멋있거든요, 강도진 씨."
이수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도 조금 설렜다. 아이들 없이 둘만의 놀이공원이라니. 그 자체가 낯설고, 조금은 비밀스러웠다.
놀이공원 안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풋풋한 20대 커플들로 인산인해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이수의 시선은 자꾸만 그들에게 머물렀다. 솜사탕 하나를 나눠 먹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얼굴들, 서로의 가방을 들어주며 투닥거리는 뒷모습들. 이수의 시선은 자꾸만 그 푸른 얼굴들에 걸렸다.
도진이 그걸 눈치챘다.
"자기야, 우리도 교복 빌려 입어볼까?”
도진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이수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유, 됐어. 이 나이에 무슨 교복이야. 주책이라고 손가락질받아."
이수는 웃었지만, 마음 어딘가가 묘하게 저릿했다. 그 푸른 계절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주 잠깐 아쉬움처럼 스쳤다.
강도진은 줄 서 있는 학생 커플을 보며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도... 스무 살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 말은 장난처럼 흘렸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닿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이수의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 만약 그 시절에 만났다면, 지금보다 더 오래 서로를 기억할 수 있었을까. 더 많은 계절을 함께 건널 수 있었을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틀란티스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랬으면, 우린 지금처럼 못 만났을 거야. 그때의 나는, 자기를 몰라봤을걸.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으니까."
도진은 한숨처럼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땐 자기를 못 버텼지. 지금의 나라서, 상처도 받아보고 무너져도 본 지금이라서 자기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아는 거지.”
장난처럼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그들은 이미 많은 계절을 통과해온 사람들이었다.
아틀란티스 줄이 절반쯤 줄어들었을 무렵이었다.
툭. 굵은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어? 비 오는데?"
이내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우산을 펼치거나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도진과 이수는 그대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아이들과 올 때는 늘 가방에 우비를 챙겼는데. 오늘은 아무 준비도 없었다.
도진은 앞에 서 있던 대학생 커플 중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우산 파는 곳 있나요?"
그 청년은 몸을 반듯하게 세우더니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아, 네! 저 뒤에 보이는 젤리 파는 건물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그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에 도진이 잠깐 멈칫했다. 이수는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았다. 도진은 재빨리 뛰어가더니, 젤리가 알록달록 그려진 작고 동그란 우산 하나를 사 들고 돌아왔다. 아이들용인지 유난히 작고 귀여웠다.
"이거밖에 없더라."
두 사람이 그 우산을 나눠 쓰자 어깨가 바짝 붙을 수밖에 없었다. 빗물이 우산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려 운동화를 적셨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진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이수에게 속삭였다.
"우리 확실히 여기선 어르신인가 봐. 저 친구 아까 행동 봤지?"
이수가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조용히 해. 들리겠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빗속에서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우산 아래서 어깨가 부딪히고, 숨결이 섞였다. 완벽하게 가려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조금 젖어도, 조금 불편해도. 도진이 무심히 말했다.
"그래도 재미있네."
"뭐가?"
"놀이공원에서 같이 비 맞는 거."
그 말에 이수의 마음이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인생은 늘 맑은 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도, 준비되지 않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이상하게 붙들었다.
비가 잦아들 무렵, 젖은 운동화를 털며 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나 오늘 병원 다녀왔어. 선생님이 이제 매일 먹는 약은 끊어도 될 것 같대. 비상약만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도진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
“진짜?”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었지만,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이제 내가 스스로 조절할 힘이 생겼다고 하더라. 근데 막상 끊으려니까 좀 이상해. 약 없이도 괜찮을까, 싶고.”
말은 담담했지만,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도진은 아무 말 없이 이수의 젖은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단단한 손이었다.
“비 오면 우산 쓰면 되고, 좀 흔들리면 나 잡으면 되지.”
이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가 완전히 그친 걸 알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롯데월드는 마법처럼 변했다. 매직캐슬의 조명이 켜지고, 퍼레이드의 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두 사람은 회전목마 앞으로 향했다. 이른바 '인생샷'을 찍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그곳에는 10대와 20대 초반의 연인들뿐이었다. 30대 후반, 아니 40을 바라보는 커플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진짜 찍어? 좀 창피한데..."
이수가 주춤거렸지만, 도진은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수의 손을 꼭 잡고 줄의 맨 끝에 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맞잡은 손바닥에서 시작된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화려하게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황금빛 조명 아래 서자, 이수의 표정이 묘하게 젊어졌다.
"나 이런 데서 사진 찍는 거, 거의 처음인 것 같아."
이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동안 놀이공원은 늘 아이들 중심이었다. 넘어질까, 잃어버릴까, 다칠까. 설렘 대신 책임이 먼저였던 시간들. 도진이 그녀의 손을 더 깊이 잡으며, 이수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 놀이공원에 있는 어떤 여자보다, 이수 네가 가장 예쁘더라."
그 말에 이수의 마음 깊은 곳이 조용히 풀어졌다.
놀이공원을 빠져나오는 길, 퍼레이드의 마지막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화려한 소음이 잦아든 뒤 찾아오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도진이 이수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자기를 더 오래 좋아할 수 있었을 텐데."
도진의 목소리엔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이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빙그레 웃었다.
"지금부터 오래 하면 되지. 우리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으니까, 남들보다 더 천천히, 더 깊게 가면 되잖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창밖의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이수는 독백했다.
이 사람이 너무 늦게 와버린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잃고 싶지 않았다. 어린 날의 사랑이 불꽃처럼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사랑은 벽난로 속 장작불 같다. 눈에 띄게 화려하지 않아도 밤을 통째로 버텨내는 힘.
늦게 만난 사랑은 짧은 것이 아니라 깊은 것이다. 그리고 깊다는 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돌아서야 만난 서로였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손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온기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엇갈린 계절의 끝에서 비로소 마주한 두 사람의 보폭은, 11월의 찬 바람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가장 찬란한 시절을 비껴온 뒤에야 서로의 그늘이 얼마나 아늑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좁은 우산 아래 포갠 어깨로 늦게 도착한 온기의 깊이를 가늠하는 밤. 불꽃처럼 타오르기보다 장작처럼 오래 머무는 마음으로, 당신이라는 계절을 천천히 건너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