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상 이후의 침묵

가장 높은 곳에서 마주한, 가장 낮은 곳의 흉터

by 아를밤

어느덧 서로의 온기에 익숙해진 지 50일. 늦여름의 끈적임은 가시고, 밤공기엔 기분 좋은 서늘함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편의점의 시계는 여전히 정직하게 흘렀고, 퇴근길 나누는 긴 통화는 일상의 소음마저 달콤한 배경음악으로 바꾸어 놓았다. 창문을 열면 느껴지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이수가 도진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자기야, 나 어릴 때 아빠랑 남한산성에 갔던 기억이 나.

아빠 손 꼭 잡고 올라가면서 도토리묵이랑 홍합탕 사 먹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정상에서 전경 내려다보고 나면, 내려오는 길엔 항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숙을 먹었거든.

그때 아빠랑 보냈던 그 시간이 내 마음속엔 가장 예쁜 풍경으로 남아있어.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우리 거기 야경 보러 안 갈래? 그 풍경을 꼭 같이 보고 싶어."

도진은 이수의 가장 소중한 기억 속으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몽글해졌다.

"나도 꼭 가보고 싶어."

도진의 대답엔 설렘이 가득했다.


다음 날 저녁 8시. 편의점이 아닌 밖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치 첫 데이트를 앞둔 아이들처럼 들떴다. 남한산성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걷기 시작했을 때, 상쾌한 가을 공기가 허파 깊숙이 들어왔다.

정상에서 마주한 서울의 야경은 보석을 뿌려놓은 듯 찬란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예쁜 각도를 찾아 스마트폰 셔터를 눌렀다.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수를 보며, 도진은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다.

산을 내려가는 길, 두 사람의 발걸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느릿해졌다. 가로등 불빛이 띄엄띄엄 놓인 호젓한 산책로를 걸으며 이수가 먼저 입을 뗐다.

"도진아, 오늘 정말 고마워. 사실 아빠랑 온 이후로 여기 다시 오는 게 숙제처럼 남아있었거든. 그런데 오늘 자기랑 같이 걷다 보니까, 그 소중한 기억 위에 새로운 행복이 겹쳐지는 기분이야."

도진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대답했다.

"나야말로 고맙지. 이수가 나를 이런 소중한 추억 속으로 초대해 준 거잖아. 아까 야경 보면서 웃는 네 얼굴 보는데... 그냥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더라. 누구의 엄마나 한 매장의 매니저가 아니라, 진짜 '이수'로 웃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좋았어."

두 사람은 걷다가 멈춰 서서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밤공기 속에 섞인 풀냄새와 서로의 숨결.

"우리, 다음엔 그 백숙집도 꼭 같이 가자."

도진의 약속에 이수는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완벽한 여운이었다.


하지만 행복의 정점에서 한 발짝 내려온 순간, 예상치 못한 균열이 시작되었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는 내리막길을 걷던 중, 도진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이수의 웃음을 담았던 그 화면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 오늘 게임 숙제를 안 했네. 지금 오토 좀 돌려야겠다."

밝은 빛과 함께 게임 화면이 켜졌다. 이수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잡았던 손을 살짝 풀고, 숨을 고르려 애썼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반복됐다. 아빠와의 소중한 추억 위에 이제 막 행복을 덧칠하고 내려오는 이 신성한 길에서, 그는 고작 '게임 숙제'를 떠올린 것이다.

"뭐 하는 거야? 나랑 함께하는 이런 순간에 지금 꼭 그걸 해야 해?"

이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지만, 도진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어, 이거 지금 안 돌리면 내일 보상이 깎여서... 내가 하는 건 아니고 오토만 돌려두면 돼. 금방 끝나."

이수는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어깨가 자연스레 움츠러들고, 차갑게 돌아선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차라리 혼자였으면, 이렇게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산길을 내려가는 이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맞잡았던 손은 어느새 풀려 있었고, 그 빈자리로 시린 가을바람이 파고들었다.

도진이 옆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을수록 이수의 속은 예민하게 뒤틀렸다. '나랑 있는 이 순간이 고작 게임 보상보다 못한 걸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차가 세워진 주차장까지 가는 그 10분 남짓한 시간이 이수에게는 영겁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차 문을 닫는 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울렸다. 차 안의 공기는 이미 질식할 듯 팽팽했다. 운전석 옆에서 느껴지는 도진의 조급한 숨소리조차 이수에게는 거슬리는 소음일 뿐이었다. 이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 전 산길에서 보았던 도진의 푸른 액정 빛을 떠올렸다.

아빠와의 홍합탕 냄새, 도토리묵의 고소함, 그리고 생애 가장 완벽했던 야경. 이수가 평생을 아껴온 그 기억의 제단 위에 도진은 고작 '게임 보상'이라는 먼지를 흩뿌렸다.

이수에게 이 시간은 영혼의 숨구멍이었으나, 도진에게는 그저 게임 오토를 돌려야 할 자투리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이수의 방어기제는 다시 얼음장 같은 냉기로 변해 그녀를 감쌌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 대가가 고작 이런 '우선순위의 밀려남'이라면, 그 상처의 크기를 아는 이수에게는 차라리 다시 고립을 자처하는 것이 나았다. 이수의 침묵은 이제 단순한 화가 아니라, 상대를 도려내려는 투명한 칼날이 되어 도진을 압박했다.

운전대를 잡은 도진의 머릿속은 이미 거대한 해일이 덮친 듯 아수라장이었다. 도진은 핸들을 잡은 손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옆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수의 냉기는 도진의 뇌 속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지옥 같은 기억을 깨웠다.

처음엔 그저 당황스러움이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하는 의구심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이수의 옆얼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냉기에 도진의 사고는 마비되기 시작했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차 안을 비출 때마다, 도진은 이수의 꽉 다문 입술을 훔쳐보며 침을 삼켰다.

'이 차가운 공기... 익숙해.'

도진의 마음속 깊은 곳, 억눌러두었던 기억들이 웅성거리며 깨어났다. 십수 년 전, 외도를 들킨 아내가 적반하장으로 내뱉었던 차가운 한마디. "너랑 있으면 숨이 막혀.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겠어."라며 자신을 밀어내던 그 냉소적인 눈빛이 지금 이수의 침묵 위로 겹쳐 보였다.

지금 이수의 침묵은 그때의 공포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도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천 번의 자책과 공포가 해일처럼 몰아쳤다. '내가 또 망쳤어. 이 여자도 곧 나를 경멸하며 떠나겠지. 나는 역시 누군가에게 충분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건가?' '말을 해야 해. 사과해야 해. 그런데 뭐라고 하지? 화내지 말라고 하면 더 화내겠지? 미안하다고 하면 뭐가 미안하냐고 묻겠지?'

아파트 단지로 가까워질수록 도로의 소음은 멀어지고, 도진의 시야는 암전되듯 흐려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건 공황보다 더 지독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것 같은 근원적인 공포였다.


'이대로 집에 보내면 끝이다.'

본능적인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수가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자신은 다시 그 지독한 고독의 방구석으로 던져질 것만 같았다. 병원을 전전하며 약에 기대어 겨우 버텼던 그 비참한 시간들이 환영처럼 눈앞을 가렸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나를 버리지 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 같은 말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안으로 곪아 터졌다. 머릿속이 하얘지다 못해 암전되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운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수가 차문을 열고 도망칠 것 같은 공포에 도진은 아파트 단지 보이는 길가에 황급히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정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완벽했던 밤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이 거대한 결핍과 상처를 이수가 알게 되는 순간 정말로 경멸하며 떠나버릴 것 같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수는 아무 말 없이 핸들만 잡고 있는 도진이 답답해 소리를 질렀다. 그때, 참다못한 이수의 날 선 외침이 도진의 정적을 찢고 들어왔다.


"변명을 하든지, 화를 내든지! 뭐라고 말 좀 해봐! 방금 그게 우리에게 어떤 시간이었는지 몰라서 그래?"

그 순간, 이수의 날카로운 일갈이 도진의 마음 속 제방을 터쳐버렸다. 그리고는 단단한 줄만 알았던 그의 세계가 처참하게 붕괴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내가 미친놈이야. 잘못했어. 그런데 이수야... 제발 그렇게 보지 마. 나... 나 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아. 네가 그런 눈빛으로 날 처다보면, 나는 다시 그 캄캄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서... 죽을 것 같아."

도진은 흐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의 능청스럽던 '천마'는 없었다. 그저 과거의 상처에 발이 묶여 울부짖는, 길 잃은 어린아이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 좀 살려줘, 이수야... 가지만 마... 제발..."

도진의 비명 같은 오열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횡설수설하며 어린아이처럼 오열하는 도진을 보며, 이수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앞에 흔들리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왔다.

‘이 사람도 아픈 사람이구나... 내가 향한 칼날이 너무 날카로웠던 거구나.'

단단한 줄만 알았던 이 남자의 어깨가 처절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이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서운함이 정당하다고 믿었으나, 그 칼날이 향한 곳이 도진의 가장 연약하고 시린 '역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수의 얼음 같던 마음 위로 뜨겁고도 아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분노가 이 사람의 가장 시린 흉터를 정면으로 관통했다는 것을. 이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날 선 반응을 되돌아보며, 오열하는 도진의 무너진 마음을 말없이 응시했다.


남들에겐 그저 스쳐 갈 가벼운 바람이었을 일이, 우리에겐 모든 걸 휩쓰는 폭풍이 된다. 다 나은 척 숨겨온 상처가 사실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이 위태로운 마음. 그것은 상처 많은 우리가 다시 사랑하기 위해 견뎌야 할 아픔이었다.



가장 높이 올랐다고 믿은 순간, 숨겨둔 밑바닥이 비명처럼 터져 나옵니다. 다 나은 척 덮어둔 흉터가 파르르 떨릴 때, 우리는 그저 아픈 채로 어른의 가면을 썼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무너진 어깨 위로 쏟아지는 울음 앞에서, 내가 든 칼날이 얼마나 시린 곳을 겨눴는지 비로소 마주합니다.

"여전히 혼자였다면, 이렇게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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