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만의 시계

세상의 속도와 상관없이, 우리답게 흐르는 시간

by 아를밤

대부도를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안, 조수석 발치에 놓인 종이봉투에서는 여전히 갓 찐 찐빵의 달큰하고 구수한 온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좁은 차 안을 가득 채운 건 더 이상 서먹한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고단한 삶을 묵묵히 응시하고 껴안은 뒤 찾아온, 깊고 안온한 여백이었다. 이수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서해의 풍경을 보며, 도진이 건네준 그 투박한 진심의 무게를 혼자 가늠해 보았다.


서울에 들어서자 익숙한 도심의 소음과 어지러운 네온사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 빛들은 이수의 숨을 조여오는 생존의 증거들이었으나, 오늘 밤은 어쩐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남겨진 거실, 이수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엄마, 혹은 아울렛 매장의 메니저로만 불리던 시간들 너머로 도진이 불러준 '체리'라는 이름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수의 가슴은 오래 따뜻했다.

그의 세계에서 자신이 인공적인 시럽 맛이 아닌, 생생한 과육을 가진 '진짜'였다는 사실이 이수의 가슴을 벅찬 고마움으로 적셨다.

타인의 시선이 지옥이 아닌,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늦은 밤, 짧은 진동과 함께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도진이 보낸 사진 뭉치였다. 대부도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갈매기를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찰나, 그리고 노을 아래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의 그림자.

사진 속 이수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억지로 꾸며낸 <논어>의 평정심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가장 정직한 행복의 얼굴이었다. '나도... 그런 얼굴로 웃고 있었구나.’


이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엄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엄마의 거친 손을 이수는 조심스레 맞잡았다.

"엄마."

"응, 왜?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자지."

이수는 엄마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며칠 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수줍게 털어놓았던 때와는 공기의 무게가 달랐다.

"엄마, 전에 말했던 그 사람 말이야... 이번 여행에서 알았어. 그 사람 옆에선 내가 그냥 ‘나’로 숨 쉬고 있더라고. 그 사람이 나를 ‘체리’라고 불러주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뻔했어."

이수의 목소리에 전보다 더 단단한 확신이 실렸다.

"엄마, 나 그 사람하고 같이 ‘우리’의 시간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 이젠 그냥 좋아하는 마음만 있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이 짊어진 무거운 짐들까지, 내가 같이 나눠 들고 싶어졌어. "

엄마는 대답 대신 딸의 손을 꽉 쥐어주었다. 그 침묵은 "그래, 너도 이제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라"라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격려였다. 그 밤은, 이수의 마음 어딘가에 분명한 시작점으로 남았다.


대부도의 마법 같은 주말이 지나고, 서울의 시간은 다시 무자비한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울렛 매장의 재고 정리와 아이들의 학원 스케줄, 그리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일상의 피로. 하지만 그 고단한 한 달을 버티게 한 것은 거창한 약속이 아닌, 아파트 상가 편의점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었다.

밤 10시 30분. 세상이 잠들 준비를 하는 그 시각, 두 사람만의 '편의점 시계'가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했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는 언제나 도진이 먼저 와 있었다. 퇴근길의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이었지만, 이수를 발견하는 순간 그의 눈가는 봄눈 녹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남들에게는 그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리함의 상징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편의점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쉼터였다.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 아울렛 행사 기간이라면서."

도진이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이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이수는 캔을 손에 쥔 채, 하루 종일 조여 있던 마음을 천천히 풀어냈다.

"하... 오늘 진상 한 사람 때문에 멘탈이 나갔었는데... 신기하게도? 여기 앉아서 캔 하나 들고 자기 얼굴 보고 있으니, 오늘 하루는 그냥 흘려보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체리야. 우리가 여기서 보내는 이 시간이 나한테는 하루를 잘 끝내게 해주는 시간이야. 세상 시계는 제멋대로 돌아가는데, 여기 편의점 시간만은 꼭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 같아."

도진의 말에 이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의 시계는 숫자로 기록되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온도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자정을 넘긴 시각. 내일의 생존을 위해 각자의 '동'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진의 옷소매를 살며시 맞잡았다.

"자기야, 고마워. 오늘도 덕분에 내 마음의 시계가 평온해졌어."

"내일도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 우리만의 시계를 맞추러."

헤어지는 뒷모습 위로 편의점의 형광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한 달 전 대부도에서 확인한 '우리'라는 테두리는, 이 작고 초라한 편의점 테이블 위에서 매일 밤 조금씩 더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타인의 박자에 맞추느라 엉켰던 숨을 창백한 불빛 아래서 고요히 풀어냅니다. 숫자로 증명되는 하루 끝에 오직 서로의 온도로만 흐르는 시간을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세상의 소음은 먼 풍경이 됩니다. 멈춰버린 시계 밖에서 오로지 우리만의 속도로, 조용히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밤입니다.

"여기 편의점 시간만은 꼭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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