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의 <물 뿌리는 살수부>를 통해 본 영화적 사건과 미학
2019년 4월 24일 개봉한 마블(Marvel) 사의 <어벤저스: 엔드 게임 Avengers: Endgame>은 27억 9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영화 아바타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가 되었다. 개봉 후 전 세계적으로 흥행가도를 달린 이 영화를 보면 영화라는 매체가 인간의 삶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향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것의 근원적인 속성은 무엇이고 이것이 다른 예술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기에 우리는 영화에 이토록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것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1895년 6월 10일 프랑스에서 상영된 뤼미에르(Rumiere) 형제의 초창기 작품 중 하나인 <물 뿌리는 살수부, The Sprinkler Sprinkled>는 최초의 스토리를 가진 영화이다. 45초로 구성된 이 영화에는 물을 뿌리는 살수부와 꼬마가 등장한다. 살수부는 호스를 이용해 물을 뿌리다 꼬마의 장난으로 인해 물을 맞게 되고 도망치는 꼬마를 붙잡아 물을 뿌리며 끝이 난다. 이 짧은 러닝타임 안에 하나의 조작된 상황이 존재하고, 서사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일종의 코미디 영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기록영화가 아닌 최초로 내러티브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현재까지 예술로서 발전된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어쩌면 일반적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영화를 떠올릴 때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영상물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그전까지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내러티브 구조를 지닌 예술의 영역에서 문학 소설이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해 왔었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등장으로 그 영역을 양분, 어쩌면 요즘 시대에서는 그 자리를 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영화만의 독자적인 속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물 뿌리는 살수부>에서 살수부와 꼬마에 의해 일어난 사건은 미리 조작된 사건이다. 일종의 트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얼리티가 아닌 트릭을 사용한 조작된 상황에서 관객들은 이미 이것이 트릭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즉, 트릭이 사용된 조작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관객들은 이것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아니라는 냉소적인 반응보다는 그러한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웃음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에 반응하고 이를 소리 내어 웃음으로서 표출한다. 어쩌면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마주침보다는 유희적 활동으로서 영상을 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존재한다. 정말로 리얼리즘이 관객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상관관계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사건이 단순히 내러티브적 서사구조를 가진 스토리라고만 한다면 영화의 독보적인 영역에 대한 질문이 해결될 수 없다. 왜 영화가 문학 소설과 다른지에 대해서 말이다. 트릭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영화 기술과 더불어 시간에 따른 영화 기법의 발전으로 더욱더 정교해짐과 동시에 비현실적인 면을 보다 많이 내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편집의 힘을 빌린 몽타주 기법으로 이러한 조작된 상황을 연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지기도 했다. <물 뿌리는 살수부>의 경우 짧은 러닝타임과 동시에 하나의 쇼트 안에서 사건을 진행하기에 리얼리티적인 면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조작된 상황을 표현한다. 하지만 편집기술의 발달로 이후 제작된 많은 영화들에서는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된 영상을 짜깁기 하여 편집을 통해 조작된 상황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이것이 영화의 리얼리티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영화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나의 쇼트에서는 근원적인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장면을 연출해야만 영화적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바쟁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의 <금지된 몽타주>에서 바쟁은 영화적인 것에 대해 설명한다. 궁극적으로는 나날이 발전해온 편집 기법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몽타주가 영화의 본질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쇼트 안에 객관적인 내용보다 다른 쇼트들과의 관계와 구성에서 의미를 자아내는 몽타주 기법은 영화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바쟁은 여기서 한 영국 감독의 영화를 예시로 든다. 영화 속 영국인 부부와 자녀가 남아프리카를 탐험하는 내용에서 부부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소년이 정글을 헤매다 새끼 사자 한 마리를 데려온다. 이어서 어미 사자가 돌아와 냄새를 통해 새끼 사자를 추적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 뒤에 부모들이 없어진 자녀를 찾는 장면이 잇따라 등장한다. 영화는 이러한 사건들을 전부 시공간적으로 결합된 이미지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몽타주로 지금까지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새끼 사자를 데리고 온 소년과 뒤 쫓아온 어미 사자 그리고 이 장면을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을 하나의 쇼트 안에 담아 보여준다. 이러한 촬영을 바쟁이 극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장면 하나 때문에 앞에서 몽타주 처리했던 모든 것들이 생기를 얻는다.”, “몽타주는 이런 상황에서는 전형적으로 문학적이면서 반 영화적인 장치다. 이와 반대로 영화적 특수성을 순수한 상태로 포착하면 공간적 통일성의 사진적 존중 속에 놓여 있다.” 문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이야기의 전개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이것을 사진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공간적 통일성을 갖고 세 요소를 하나의 공간 속에 들여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처리가 결국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사건을 영화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간적 통일성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 바쟁이 주장하는 영화의 원칙이다. 바쟁의 말을 다시금 인용하자면 “한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이 둘 또는 그 이상 요인의 동시적 제시를 필요로 할 때, 몽타주는 금지된다.” 그는 롱테이크 양식을 지향함과 동시에 이러한 양식을 통해서 사건을 영화적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적용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영화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예시로 줄리앙 뒤비비에(Julian Duvivier) 감독의 <나의 청춘 마리안느 Marianne De Ma Jeunesse>라는 1955년 프랑스 영화를 얘기해보자. 주인공 뱅상이 위험에 빠진 마리안느를 구하러 가는데 이를 질투한 리즈라는 다른 여자가 뱅상이 좋아하는 사슴을 죽인 후 뱅상을 쫓아간다. 그다음 장면의 내용은 사슴들이 리즈라는 여자를 죽이는 내용이다. 여기서 감독은 쇼트 역 쇼트를 통해 외화면을 바라보는 리즈의 얼굴과 수사슴을 보여주고 교차편집을 통해 도망가고 쫓는 리즈와 사슴들을 보여준다. 이후 내레이션을 통해 리즈라는 애가 사슴에 의해 밟혀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해준다. 바쟁은 이러한 식의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리즈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몽타주를 통해 감독은 처리했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인 이 사건은 완전히 다른 곳에서 촬영되어 공간적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을 단순히 내러티브의 전개에 종속되어 있다고 바쟁은 비판하면서 이것은 사건을 존중하지 않고 쇼트 밖에서 의미가 발생하게 되기에 사건이 영화적 사건으로 만들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바쟁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진 영화가 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영화 <서커스 Circus>에서 중간에 채플린이 사자 우리에 들어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서 채플린과 사자는 몽타주를 통해 교차편집되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쇼트에 함께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공간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고 단순히 문학적인 내러티브에만 종속되지 않음으로써 이 사건이 영화적 사건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들은 사자가 잘 조련된 사자라 생각하고 어떠한 장치가 있을 것임을 자각하지만 이 사건에 반응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인 공포감과 초조함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위와 같이 한 쇼트를 구성하였기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의 사건이 영화적 사건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쇼트 안에 공간적 통일성을 확보하며 이것이 단순히 문학적으로 내러티브에만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사건은 영화적 사건이 되고 영화가 문학과 다른 독보적인 영역에서 내러티브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초창기 영화 <물 뿌리는 살수부>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사에서 중요하게 간직해야 할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쇼트 안에 살수부와 꼬마의 행위가 공간적 통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하였기에 이 작품 속 사건은 영화적 사건이 될 수 있었다. 기법의 발전을 통해 몽타주가 발전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오히려 영화를 영화답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영화가 문학이나 사진과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어야만 영화는 영화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영화가 갖는 근원적인 속성이다. 물론 몽타주가 쓰일 수도 있지만 초창기 영화에서 확인했듯이 공간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최소한 하나의 쇼트에서 그 점이 확보될 때 사건은 영화적 사건이 되고 영화는 영화라는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 영화가 소설과 달리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활자가 아닌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습을 빛의 보존을 통해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에 비해 이러한 강점을 지닌 영화가 미학적으로 더욱더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리얼리티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허구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서사를 진행하지만 리얼리티의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몽타주는 리얼리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트릭에 트릭을 더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몽타주가 필요한 씬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바쟁의 말대로 반드시 최소한 한 씬에서 쇼트 안에 모든 것이 담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보장해줄 수 있고 여기서 발생하는 리얼리티를 통해 사건이 영화적 사건으로 될 수 있고 우리는 여기서 미학적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쟁의 말을 인용하자면 “어떤 시도가 미적으로 충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에 일정한 트릭이 쓰였음을 알면서도 이 사건의 리얼리티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영화의 미학적인 가치를 지킬 수 있을 때만이 영화가 다른 예술과 달리 영화라는 독립적인 예술로 존재할 수 있다. 소설이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발판을 제공해준다면 영화는 관객들에게 무한한 체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인간이 시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화 내에서도 시공간 적인 통일성을 최소한으로라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몽타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쇼트 안에 모든 것이 공간적 통일성을 갖고 담겨야만 한다.
이제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영화에서 기록영화든 서사구조를 가진 영화든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물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허구성을 어느 정도 가질 수밖에 없다. 기록영화의 경우 리얼리즘을 보장받는 것이 필요하고 어쩌면 쉽다. 하지만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 역시 리얼리즘이 필요하다. 한 손에는 허구성을 쥐면서 다른 한 손으로 리얼리즘을 놓아버린다면 그것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리얼리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바쟁이 얘기했듯 사건을 영화적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적 사건은 결국 한 쇼트 내에 공간적 통일성을 지니게끔 사건의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사진적 존중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이러한 영화의 속성을 우리는 초창기 영화 <물 뿌리는 살수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꼬마가 장난을 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에서 사건의 요소들은 전부 한 쇼트 내에 같이 등장한다. 서사적인 내러티브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었던 요인은 아마 이렇게 리얼리즘의 요소를 최소한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러한 구조와 장치를 통해 조작된 허구의 상황임을 관객이 인지하면서도 리얼리즘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미학적인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영화가 다른 예술과 구분될 수 있는 근원적인 속성과 미학적 잠재력을 뤼미에르 형제의 <물 뿌리는 살수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영화만의 ‘공간적 통일성과 사진적 존중’이라는 특징을 통해 재현 예술에 독자적인 영역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고 미학적 가치도 여기서부터 나온다. 영화란 결국 관객에게 체험을 선사하고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