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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최후의 장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읽고

by 심숑

1636년 12월 14일 조선의 임금 인조는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날쌘 야생마처럼 쏜살같이 남하한 청병은 삼전도에 진을 치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현실적으로 산성에 조선군은 성 밖에 나가 적을 토벌하는 것은 물론 수성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삼남과 양서 지방의 주력부대와 그 지휘관인 도원수의 부재 속에서 임금과 묘당의 신하들은 난국을 타개할 방법, 즉 조정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의논하였다. 대의를 따라 적과 화친하지 않고 끝까지 수성하는 것이 곧 출성 하는 것이며 그 길이 이 조선의 조정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는 척화파들과 청과 화친을 맺고 목숨을 보존하며 조선의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는 주화파들의 말과 말의 뒤엉킴 속에 그들은 47일을 산성에서 보냈다.


피난의 목적지로 택한 남한산성은 조선의 임금, 조정의 신하, 성첩의 군병, 민촌의 백성들이 어우러지고 생활하여 마치 조선이라는 나라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임금은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고 도성에서 그랬듯이 예법을 따르며 생활한다. 묘당에서 대신들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펼치고 해법을 찾기 위해 의논한다. 민촌의 백성들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오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며 지낸다. 이들 각각은 현실을 보는 눈과 현실을 느끼는 생각이 저마다 달랐다. 임금은 사직을 보존하려 하고 묘당의 대신들은 대의를 고려해가면서 난국을 타개할 해법을 찾고자 하며 주화냐 주전이냐를 놓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쟁하고 의논한다. 민촌의 백성들과 성첩의 군병들은 종묘사직을 떠나서 어서 빨리 이 난국이 끝나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렇듯 이들은 서로 상황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서로가 서로를 보며 답답할 것이다. 이성적으로 보아 단순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자 성문을 굳게 잠그고 눌러앉아 현실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조정이 이상한 것일까?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쉽게 택하지 않는 조정에 답답함을 느끼는 백성들이 정상인 것일까?


반드시 그렇다 할 수 없다. 조정의 대신들이 주화냐 척화를 놓고 논쟁하는 것이 단순히 청나라 군병들의 침략에 맞서 조선이 취해야 하는 입장을 놓고 벌이는 논쟁이 아니다. 그들은 육체적, 정신적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 고차원적인 철학적 논쟁을 펼치는 것이다. 삶으로써 죽느냐, 죽음으로써 사느냐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철학적 논쟁이 주화냐 주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김상헌을 필두로 한 척화파는 육체적 삶보다는 정신적 삶에 더욱더 많은 가치를 두고 대의명분을 위해 죽고자 한다면 사는 것이오, 육체의 삶을 위해 정신을 죽이는 행위는 진정 인간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반대로 최명길을 필두로 한 주화파는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육체적 삶을 정신적 삶의 우위로 보고 있다. 육체적 삶을 지속시켜야 정신적 삶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당장의 치욕이 훗날에 정신적, 역사적 성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척화론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육체, 정신적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느끼는 철학적 가치관을 논리로 무장하여 현실정치에 투영시켜 자신들의 논리적, 이성적 사상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학문을 단순히 학구적으로 겨루었다기보다는 현실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의 학문을 바탕으로 입장을 표출하고 그러한 입장을 통해 학문을 겨룬 것이다. 청병이 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이에 대해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육체적, 정신적 삶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적인 생각을 현실적인 문제에 투영시켜 담론을 제시한 것이다.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고 조선 팔도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담론을 한양, 도성으로 모았고 첨예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결국 삼전도에 주둔한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그들은 산성을 마지막 논쟁의 장으로 선택한 것이다. 정신적 삶의 육체적 삶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는 자들의 생각은 예조판서 김상헌으로 수렴하였고, 육체적 삶의 정신적 삶에 대한 우위는 이조판서 최명길로 수렴된 것이다. 조선 팔도에서 도성으로, 도성에서 남한산성으로 축소되었고, 조선 팔도의 사대부들에서 조정 대신들로, 조정 대신들에서 김상헌과 최명길로 논쟁은 간략하고 축소되었다. 이러한 축소의 과정에서 각각의 주장들은 힘을 중심으로 모았고 남한산성에서 최후의 논쟁을 펼쳤다. 이렇듯 47일간의 논쟁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청과 화친할 것인지, 화친을 배척하고 청과의 싸움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아닌,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 사대부들이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에 대해 자신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학문적이며 철학적인 논쟁이라 볼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렇다. 학문과 현실정치를 동 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사대부들의 학문적 수양은 곧 나라의 실제 정치에 투영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학문적 사상과 근거를 바탕으로 그들은 정책을 만들고 나라의 주요 쟁점에 대해 논쟁하여 공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론은 곧 조선이라는 나라가 가야 할 길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학문의 나라였다. 그들은 합의의 중요성을 알고 학문과 정치를 유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국가의 중대사에 관해 국가가 올바르고 다수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게끔 학문적 바탕을 근거로 논쟁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한 논쟁 속에 합의되고 선택된 공론을 통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공론이라는 것이 전체 백성들의 생각을 담아내지는 않는다는 점, 즉 사대부들의 생각만을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한계점을 가질 수 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임금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닌 조선 팔도의 사대부들이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각 지방의 의견을 수렴하여 도성에서 자신들의 의견으로 논쟁을 펼쳐 끝내 선택된 공론이라는 것이다. 병자호란의 시기 이러한 학문적 바탕의 정치적 논쟁의 장은 한양에서 남한산성으로 수렴되었고, 도성에서 첨예한 논쟁을 펼치던 대신들의 논쟁은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으로 수렴되었다. 그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청의 침입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외부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계속해서 그들 자신들이 해오던 학문적 바탕을 가진 정치적 논쟁을 하였고 결국 시대와 역사의 흐름은 주화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남한산성 속 조정의 대신들과 임금에게 산성 밖 포위하고 있던 청병이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상적 논쟁을 펼쳤고 그러한 논쟁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났기에 그들은 산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적장 용골대, 그리고 청의 칸은 궁금했던 것이다. 저들은 왜 산성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싸울 의지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수성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왜 산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것 인가? 답은 이렇다. 조선은 자신들의 논쟁을 끝내야만 했다. 단순히 청과 화친을 맺느냐, 끝까지 맞서 싸우냐는 논쟁이 아닌 육체적, 정신적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끝을 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의 끝에 조선이 가야 할 길이 있었고 그들은 그러한 길을 찾아야만 했기에 산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결국 시대의 상황은 주화의 손을 들어주었고 육체적 삶을 얻음과 동시에 얻은 정신적 죽음인 치욕은 조선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의 논쟁은 육체적, 정신적 삶과 죽음에 대한 조선 최고의 철학적 논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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