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작가의 '혁명'을 읽고, 영화 '신세계'의 모티프를 통해
삼봉(三峰) 정도전, 송헌(松軒) 이성계, 포은(圃隱) 정몽주를 아는가. 이들의 이름 석 자는 조선왕조실록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자라면 눈에 익은 이름일 것이다. 여말선초 격동의 혼란기 시기 이들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세상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이러한 부조리함을 타파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다. 원나라의 정치개입으로 혼탁해진 정계, 이러한 정계의 부산물인 가렴주구의 희생양이면서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의 대상이었던 백성들의 피눈물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백성들의 절망을 원동력 삼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혁명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혁명. 그것은 분노와 절망이 극에 다른 지점에서 소리 없이 자연스레 진행되는 것이다. 혁명이란 마치 달이지고 새로운 해가 뜨듯이 분노와 절망이 가득 찬 세상이 새로운 세상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내주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정도전, 이성계, 정몽주는 백성들을 위한 세상을 다 함께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은 혁명의 결과인 백성들을 위한 세상을 방으로 비유하였을 때 제각기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들이 함께 가고자 했던 신세계는 어떤 세상이었을까. 여기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아니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 더 이상 백성들이 절망과 고통의 피눈물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하였다. 그러한 세상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중앙집권적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왕이 유능한 재상을 뽑아 그에게 국정을 도맡아 어지고 바른 효율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재상 중심의 나라였다. 혁명이 이러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라 둘은 동의한 것이다. 이성계 역시 이들이 구상한 새로운 세상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이성계는 변방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무찌르며 백성들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마주하며 깨달은 바가 많았던 것이다. 나라의 힘이 약하여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 이러한 백성들의 고통 어린 삶을 바라보며 그는 백성들이 절망과 고통의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렇기에 정몽주와 정도전이 구상하고 제시하는 세상에 동의를 하고 혁명의 동지이자 벗으로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혁명의 목표지점이 같음을 인지하고 벗으로서, 동지로써 그 혁명에 함께 다가갔다. 자신들이 현재 서있는 세상은 분노와 절망이 극에 다른 한계선이라는 것을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낌으로써 지각하였다. 앞으로의 발걸음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시류를 파악하고 같은 목적을 향해 혁명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자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인지했다. 가고자 하였던 신세계를 서로서로가 동지로써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백성들의 절망과 더불어 그들을 혁명으로 하여금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공통된 하나의 신세계를 향해 다가갔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함께 한길을 걸어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신세계를 향해 걸음 했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신세계를 꿈꿨지만 저마다 방식은 달랐고 신세계를 열고 들어가는 문 또한 다른 문을 선택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 이후 갈림길을 마주한다. ‘용상에 왕 씨가 앉아야 하느냐, 이 씨가 앉아야 하느냐’라는 갈림길을 마주한다. 둘은 같은 해석을 내린다. “용상에 앉을 자는 왕 씨든, 이 씨든 상관없다.”. 하지만 둘은 다른 길을 걷는다. 정도전은 보다 유능한 재상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가 용상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왕 씨라는 이유로 용상에 앉아있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대장군 이성계를 추대하여 신세계로 향하는 혁명을 완수하려 한다. 정몽주는 왕 씨든 이 씨든 상관없기에 고려라는 틀 안에서 제도와 법을 손보아 신세계로 향하고자 한다. 둘은 평행의 선에서 서로를 곁눈질로 마주하며 신세계를 향해 걸어갔다. 서로의 길로 오라 손짓해가며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혁명의 길을 따라 신세계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성계는 그들 사이의 길을 걸으며 때로는 정몽주의 길에서 같이 걷고, 정도전에 길에서도 같이 걷는다. 하지만 점점 추종자들에 가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볼 수 없었다. 결국 한쪽의 죽음, 즉 정몽주의 죽음을 초래하여 신세계를 향한 정도전의 혁명의 걸음은 더욱더 무겁고 느려지게 된 것이다. 삼각 균형의 붕괴가 혁명의 진행을 더디게 했다. 이렇듯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같은 장소의 다른 면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에 그들의 혁명은 힘을 얻었던 것이다. 혁명의 방식의 차이는 그들의 신세계를 향한 발걸음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길들을 걷고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 다른 것 들을 보고 나눌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점들이 그들의 혁명의 진행에 있어서 추진력과 완성도를 높여준 것이다. 때로는 앞서 나가는 이를 경계하고 뒤처지는 이를 다독이며, 그들은 같은 곳을 향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 고독한 혁명의 길을 걸었다.
신세계를 향한 혁명의 발걸음은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조선은 정도전과 정몽주가 구상하고 이성계와 정도전이 세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세 명의 혁명가가 일생을 바쳐 걸어 도착한 신세계이다. 백성들이 더 이상 절망과 고통의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라. 백성이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나라. 그러기 위해 왕권을 약화시키고 유능한 재상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 혈통보단 시스템의 의한 정치. 바로 그 나라가 조선이라 할 수 있다. 혁명의 길에선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혁명의 길에서 일어난 일들은 혁명이 완수되어 신세계에 도달해야 제대로 보이고 평가될 수 있다. 혁명의 과정에서의 정몽주의 죽음. 정도전의 뜻대로 진행되어 결과를 맺은 혁명. 그렇다면 정몽주는 실패한 혁명가인가. 그렇지 않다. 이성계는 물론 정몽주 또한 정도전이 열고자 한 문을 열고 신세계에 함께 들어온 것이다. 결국 어떠한 길을 걷고 그 길에서 고꾸라졌을지라도, 자신의 혁명동지가 혁명정신을 갖고 신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들어갔기에 정몽주 역시 성공한 혁명가라 할 수 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단순히 한 나라의 멸망, 한 나라의 건국으로만 볼 수 있는가. 정몽주를 단순히 고려의 충신, 정도전을 단순히 조선의 개국공신, 이성계를 단순히 새 왕조를 연 임금으로 보는 것만이 능사인가. 그렇지 않다. 정몽주, 정도전, 이성계는 고려 말 신세계를 향해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딘 혁명가였고, 그들이 도착한 신세계가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정몽주를 단순히 반역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조선이라는 신세계의 기틀을 정도전과 함께 구상하고 실현하려 한 개국자이다. 출발은 같았지만 과정은 상이했고 결과는 결국 같았다. 그들은 혁명의 과정을 통해 그들이 꿈꾼 신세계에 도달했고 혁명은 성공하였다. 혁명은 단순히 현 왕조를 갈아엎고 새 왕조의 아침을 여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가 혁명의 길을 걸어 자신들의 이상향인 신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 그들은 현재의 세계의 잘못됨을 깨닫고 신세계를 향해 혁명의 걸음을 걸었으며, 서로 다른 혁명의 길을 걸었지만 그들의 동일한 혁명정신은 결국 신세계에 도달하였다. 1392년 조선의 건국. 조선 건국의 의미는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 세 남자가 가고 싶었던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신세계에 그들이 결국 도달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