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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an 28. 2024

마이 슈퍼우먼

스누트 7-8월 · 2회 │ 내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 멘토에 관하여

  혜화역 4번 출구. 직장인 영어회화 저녁 반에서 그녀를 봤다. 딱 떨어지는 검정 반팔 티셔츠. 오렌지색 기하학 패턴 펜슬스커트. 거기에 인케이스 12리터 블랙 백팩에 나이키 플리플랍이라니. 네 명이 아니라 마흔 명 정원이라도 눈에 띄었을 테다. 이직을 위해 영어 공부를 하던 그녀는 원어민 티처의 늘 같은 수업 시작 질문, “How was today?”에 “오늘도 새벽 수영하고 출근했다” 든가 “갓 개업한 식당을 빌려 생일파티하다 동갑내기 가게 사장과 절친이 됐다” 든가 “담당 브랜드 패션쇼 준비로 바빴는데, 그날 오는 빈지노 보러 올래요?”(그녀는 PR회사를 다녔다.) 같은 스펙터클한 일상을 종횡무진 대답했다. 그때 나는 서울살이도, 회사원 생활도 6개월 차. ‘저 언니 보통 아니다.’란 생각이 틈날 때마다 입 밖으로 번역됐다. 

  “Wow! Superwoman!”


  5개월이 지나자 우린 호주 한국 혼혈인 선생님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눈치챘고, 그녀는 금요일 저녁 학원 밖에서 한 잔 하자고 했다. 우리는 '소피아', '로지' 대신 “은영언니”, “아름아”라 부르며 해방촌에서 세계의 모든 맥주를 마셨다. 막차 시간의 녹사평역, 친밀해진 마음에 양손을 흔들다 조금 어색해서 고개도 꾸벅였다. 그때 그녀가 날 안았다. 나는 흠칫 굳어선 목만 겨우 쭉 내밀어 나무거위처럼 안겼다. 엇박자로 그녀 등허리를 토닥이는 어쭙잖은 손과 미숙한 몸짓. 그녀는 완연한 다정함으로 나를 다시 감쌌다. 

  “오늘 정말 행복했어.”


  그 해 12월, 나는 지방 발령으로 원룸을 4일 만에 정리해야 했다. 서울의 마지막 밤, 짐 정리를 도와준 친구와 동네 이자카야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밀린 메시지를 훑었다. 그녀의 문자도 있었다. 가기 전 꼭 보자. 난 아쉽다고, 곧 놀러 오겠다고 답했다. 바로 전화가 왔고, 15분 뒤 그녀가 나타났다. 무릎까지 오는 호피 퍼 코트 아래 파자마를 입은 채. 그리고 쇼핑백을 내밀었다. 핑크색 소니 헤드셋이 담긴. 

  “자려고 누웠다 깜짝 놀랐잖아! 선물 준비할 시간이 없었어. 이거 지난주에 사서 딱 한 번 쓴 거야!”


  그리고 10년 뒤 그녀는 에이전시와 대기업, 스타트업을 거쳐 마케팅 대행사 대표가 됐다. 스물 넷에 입사한 첫 회사에서만 13년째 마케팅을 하는 내게 그녀는 지척의 선망이자 신뢰하는 참고문헌과 같았다. 내 취향의 처음은 다 그녀였으니까. 10월의 한강 바람을 맞으며 마포대교를 건넌 마라톤도, 양양에 서핑숍이 두 개뿐일 때 시작한 서핑도, 코로나 시국에 새벽 테니스반을 다닌 것도, 그저 취미였던 꽃꽂이로 행사장 연출 일을 해본 것도.


  삼성동에서 송도로 발령나고 몇 달 후 같은 팀이던 후배 둘이 예고없이 놀러 왔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헤어질 때, 나는 두 팔 벌려 그들을 안았다. 후배들이 움찔했다. 내가 새삼스러웠다. 10년 전 녹사평, 그때부터였나? 만남의 마무리는 포옹. 뜬금없는 안부 전화. 써보고 좋은 건 나누는 버릇. 기념 없는 선물. “고마워”란 입버릇. 어느새 내게 그녀가 물들어 있었다.


  “전복 한 박스 들어와서 뭐 좀 하려고. 내일 저녁 약속 없으면 우리 집 와.”  

  말복을 하루 앞 둔 점심, 그녀의 문자가 와 있다. 내게 그녀가 또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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