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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Apr 25. 2023

어느 날 내 뒤통수로 박용택이 걸어왔다

회사 피트니스 센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는 여느 날처럼 엘지트윈스 경기를 틀어놓고 러닝 머신을 달리고 있었다.

- 흑. 시작하자마자 삼진이야. 오, 투수 앞 땅볼! 아, 슬라이더를 쳐버렸네. 악, 내야 땅볼 병살이잖아!

하며 혼자 열을 냈다가 삼켰다가 박수를 쳤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뒤통수 쪽이 뭔가 싸늘하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속도를 느린 걸음으로 낮추고 뒤를 살금 돌아봤더니 P님이 나를 보고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서 계셨다. P님은 타 부서 분으로 성함은 알고 있지만 인사를 한다거나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같은 시간 운동을 한 적이 꽤 있으나 회사 센터의 특성상 운동을 하면서 인상을 쓰거나 얼굴이 벌게지는 상황이 서로에게 민망하여 친분이 없는 한 눈을 마주친다거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하고 있다. 그런데 P님이 내 뒤통수를 보고 오랜 시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서 계시다니, 왜지?

*참고, P님은 단아한 여성분이시다


- 아, P님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 운동하러 오셨어요?

- 네, 야구 좋아하시나 봐요. 항상 야구 보고 계신 것 같아서.

- 앗, 보셨군요! 야구 좋아해요.

- 엘지트윈스 팬이신가 봐요. 항상 엘지 경기 보시는 것 같았어요.

- ㅎㅎ 넵, 맞아요. 엘지트윈스 팬이에요. 오래됐어요.

- ^^ 아 역시 그러시군요.

(잠시 정적)

- (끝?)…

- 저… (내 귓가에 가까이 오셔서) 박용택 선수 사촌 동생이에요.

- 어머!!!!!!! 진짜요!!!!!!!!!???????????????? 아 대박!!!!!!!! 아 저 사인 한 장만 받아주세요오오오오오!!!!!!!!!!


잘 가꾸고 단장해 놓은 사회성을 벗어던지게 만든 위대한 단어. 엘지트윈스와 박용택.

내 뒤통수로 박용택이 찾아온 역사적인 날이었다.




나는 엘지트윈스의 골수팬이다.

라고 적어놓고 보니 골수팬의 자격에 대해 의문이 생기며 슬쩍 한 발을 빼고 싶어 진다.

나는 엘지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라고 적어놓고 보니 2005년부터 현재까지 만 18년의 기간이 진정 오랜 기간인가 검증받기가 애매하여 주춤하게 된다.


나는 엘지트윈스의 팬이다.

2005년 야구를 보기 시작한 그 해부터 지금까지 엘지트윈스 외의 팀을 응원해 본 적이 없다. 시즌 중에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든 엘지트윈스의 경기와 그 경기가 끝난 후의 야구전문 스포츠 방송 그리고 그 방송들의 재방송까지 챙겨보고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드는 해가 여러 해 있었다. 하지만 어떤 해는 시즌이 시작했는데도 영 마음이 야구를 보는 것에 동하지 않아서 매일 밤 스코어만 겨우 확인하거나 그마저도 건너뛰고 지나갔던 무성의한 해도 있었다.


특별한 팬은 역시 아니다. 자타공인 골수팬이라고 호칭되는 분들처럼 전 경기를 직관한다거나, 모든 선수들의 타율, 출신, 수비력, 심지어 연봉까지도 줄줄 외운다거나, 아님 박용택과 닮은 사람이 우는 모습만 봐도 따라 운다거나 하는 진골 팬은 아니다.


그럼 나는 어떤 팬인가.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닮고 싶지 않은 어른을 공경하는데 온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 내 곁에는 손톱 같은 초승달과 이어폰 속의 야구가 있었다. 영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러 의미들이 물거품보다 하찮게 사라지던 그런 날에도 변함없이 야구는, 엘지트윈스는, 늘 그렇듯 나에게, 언제나 그 자리에 라는 믿음으로 그곳에 있었다.

나에게 야구는 그렇게 쌓인 18년이란 시간의 퇴적물이다.


18년의 시간 동안 엘지트윈스의 경기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선수 이름이 아마 박용택일 것이다. ‘지금부터 박용택 좋아하기 시작 요이 땅!‘하고 박용택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아니다. 매해 주목받는 선수들이 바뀌고, 새로운 루키들이 나오고, 멋진 피지컬의 선수가 등장하며 피고 지는 선수들 사이에서 박용택은 나에게 초승달이었다. 누군가가 야구 선수 중에 누가 가장 좋으냐 물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 내 저녁을 가장 많이 함께 보내주었던 그 선수의 이름, 그는 박용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결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박용택 선수의 등장곡인 김범수의 ‘나타나’라는 노래가 나왔다. “왜 내 눈앞에 나타나~”라는 가사 뒤에 ’박!용!택!‘이라는 응원 구호를 짠 듯이 동시에 외치며 우리는 첫눈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

 


엘지트윈스가 승리를 하거나 패배를 하거나는 내가 야구를 보는 중요한 이유가 아니다. 엘지트윈스는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몸속 쓸개 같은 존재이다. 늘 그 자리에 있고 평소에는 특별히 그 고마움에 경의를 표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너 몸에 쓸개 있지?”라고 물으면 “그럼~ 당연히 있지! 내 쓸개 아주 잘 있지!”라고 당당히 대답하며 그 자리에 있음을 고마워하는 존재. 쓸개가 튼튼하거나, 튼튼하지 않은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뜻.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해내주기를 응원해 주는 존재가 나에게는 야구다. 우승 못해도 별 수 있나. 우승 못한다고 쓸개를 바꾸나? 가당치도 않다.


그런 날이 있다.

단 한구석도 어제보다 나아지지 않은 것 같은 허무함이 밀려오는 날이 있다.

내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져 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날이 있다.


그런 날 나는 내 뒤통수로 걸어 들어온 박용택을 생각한다.

한 사람 건너에 박용택이 있는 것을 떠올리며 가득 유쾌한 상상을 해본다.

- 갑자기 길을 가는데, 유재석 아저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촬영을 하고 있는 거야. 근데 그 프로그램 그날의 주제가 마침! 하필이면!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유명한 운동선수에게 전화 걸기인 거지? 그럼 나는 당당하게 내 쓸개, 박용택을 꺼내 보일 거야. 아주 당당하게 말이야. “한 사람 건너 아는 사람이면! 아는 사이잖아요~ ”하면서 당당하게 말이야.


그럼 나도 모르게 씩 웃게 된다. 마치 아주 튼튼한 쓸개를 가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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