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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May 09. 2023

색시를 챙겨 왔지

오늘은 우리의 아홉 번째 결혼기념일

9년 전 오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오빠와 아무 소리 깔깔 대잔치를 하며 손 꼭 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소리 깔깔 대잔치의 예)

1. 오빠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기상캐스터 하면 어때? 너무 가능하겠는데 왜~ 짱 웃기겠다 깔깔깔 심지어 노란 우비를 입고 저렇게 뾰로통한 표정이랑 섬세한 손목 스냅하면 너무 웃기겠다 깔깔 찬성 나는 오빠 기상캐스터 준비하는 거 대찬성!

2. 어! 오빠 지금 방금 마그네슘 큐티 한 거야? 마그네슘 큐티를 모른다고? 대박 그걸 모르면서 무도빠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 (자신이 모르는 이유는 그 부분이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며 반박함) 몰라 몰라 안 들려 이제부터 오빠는 무도빠 아니야 탈락! 자격 박탈이야!


정준하의 마그네슘 큐티 (출처, 무한도전)




집에 와서 “오빠 우리 엄마들 선물 어디다 뒀지?” 말하는 찰나,

뭔가 싸늘하다.


음. 캐리어를 안 찾아왔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볍다 했지.

어디다가 전화를 해야 하지. 119인가?


한참 고민하다가 오빠의 승무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다.

- 하나야 오늘 비행이야?

- 아니? 지금 집에서 쉬고 있어~

- 물어볼 게 있는데.

- 응 물어봐!

- 저… 혹시… 공항에서 캐리어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 어머 캐리어가 안 왔어?

- 아니 그건 아니고…

- 아 누가 캐리어 잘못 들고 갔구나!

-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럼?

- 캐리어를 안 챙겨 왔어…

-?? 뭔 소리야?

- 수화물 벨트에서 캐리어를 안 챙겨 왔다고…

-??? 무슨 소리야 그게 가능해? 캐리어를 안 챙겨 오면 뭘 챙겨 와?

- 색시를 챙겨 왔지…

- …



그래.

서로가 서로이면 충분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대가 나를 챙기고 내가 그대를 챙기면 그것만으로 완전한 세상인 시절이 있었지.


오늘은 우리의 아홉 번째 결혼기념일.

이제는 그냥 각자 건강이나 알아서 챙기기로 하자.

아프지 말고.


참고로,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캐리어를 수화물 벨트에서 안 들고 나오시게 되면 (쓰면서도 어이가 없네요) 공항 내부 해당 항공사 사무실로 전화를 거시면 됩니다. 사무실 직원도 손님이 캐리어를 지들이 까먹고 안 들고 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고 하네요. 하하



번외)

캐리어를 찾아 기쁜 마음으로 돼지짜글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늘 그렇듯 아무 소리 깔깔 대잔치를 하며 손 꼭 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둘 다 휴대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이건 좀 너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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