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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Jun 21. 2023

장례식장에서 생긴 일

대감집네 노비로 일을 하다 보면 상당히 다채로운 경험들을 맞이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장례지원단이다.


기업을 대표하셨던 분(혹은, 그에 준하는 분)이 상을 당하시면 회사 차원에서 회사장을 치러드리게 되고 원활한 장례식 진행을 위해 대리, 과장급 직원 일부를 장례지원단으로 선발하여 배치한다.

보통 하루에 오전, 오후 두 조로 나뉘고 조 별로 선발되는 인원수는 10명 남짓이다.


지원단에 선발된 인원들 대부분은 회사 업무에서 제외됨이 반가워 질투 어린 시선을 즐기며 기꺼이 검정 전투복을 착용하고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그 발걸음 룰루랄라 가볍기도 하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지만, 즐거웠던 첫 마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지원단 인생 최대(는 아니지만 한 일곱 번째쯤)의 난관에 봉착하게 만드는 상무님(a.k.a 장례지원단장)의 말씀.


“아 모르겠고, 알아서들 나눠서 잘해봐.”


이 짧은 말씀 안에 숨은 뜻을 나름 엘리트라 소문난 머리를 모아 모아 해석하기 시작했고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놀면 안 된다. 둘째, 잘해야 한다. 셋째, 지켜보고 있다.

 

자, 그리하여 2023 장례식 TF팀 출범.

장례 전문업체에서 이미 다수의 전문 도우미 여사님들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여서 현재 상태로는 할 일이 전무해 보이는데 열명이서 옹기종기 모여 무슨 성과를 내야 하는 걸까.

앗. 회사 내의 ‘성과’라 함은 ‘경쟁’의 동의어 아니던가.

경쟁이다!


그 순간 눈치 빠른 재무팀 대리 A가 경쟁의 신호탄을 터트렸다.

- 제가 데스크에서 부의금 받을게요.

A와 친분이 있는 인사팀 대리 B가 발 빠르게 그 뒤를 쫓는다.

- 저도 받을게요. 부의금은 두 명이 받아야죠!


그리고…


- 인사팀 과장 C : 나는 조문대에서 국화꽃 전달할게.

- 전략팀 대리 D : 그럼 전 손님들 동선 정리할게요.

- 전략팀 과장 E : D님, 그럼 D님이 입장 동선 정리해. 내가 퇴장 동선 정리할게.

- 일동 : 아 뭘 그것까지 나누세요!

- 전략팀 과장 E : 혼자 중요한 일 다 하나 그럼? 나눠서 해 나눠서~

- 기타 부서 F, G, H, I : 그럼 저희는 뭐해요… 업무 좀 나눠서 합시다…

- 업무 선점한 A, B, C, D :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냥 저기 서 있으세요. 도움이 필요한 분들 도움이나 주시고.

- 기타 부서 F, G, H, I : 너무들 하시네… 박쿠쿠님(글쓴이), 박쿠쿠님은 뭐 하실 거예요? 박쿠쿠님도 할 일 없으시죠?


그때,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나 자신 박쿠쿠가 한껏 상쾌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 박쿠쿠 : 자, 여러분. 장례지원단 경력자 박쿠쿠입니다. 저는 화환 발신처 기입 및 화환 리본 정리를 담당하겠습니다!


*화환 리본 정리란? 빈소 앞에 다 세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화를 수령하였을 때 조화의 리본들만 떼어 놓고 조화를 보내주신 조문객이 오는 시점에 맞추어 리본만 교체하는 작업을 뜻함.


- 기타 부서 F, G, H, I : 박쿠쿠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어허 이거 원! 발신처 기입은 저희에게 양보하시죠!!!




결국 신발 정리, 코트 받기, 여성 조문객 가방 받기, 비상 대응(휴지 전달)으로 업무가 분할이 되며 장례식 TF팀 전원은 공평하게 누락 없이 성과 평가를 받게 되었다.

교대시간이 가까워질수록 TF원들은 맡은 업무의 전문가로 거듭나게 되어 외모와 발사이즈에 적합한 신발을 감으로 골라 조문객이 위치할 것이라 예상되는 장소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는 수준까지 업무 능력이 향상되었다.

신발 정리 담당 기획팀 대리 H는 가만히 읊조렸다.

‘이거 남자 신발 파트 여자신발 파트 나눠야 되겠는데? 업무량이 장난이 아니네.’

 


그리하여, 그날의 빈소는 내가 여태껏 경험했던 모든 빈소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고 자부한다.

아, 무분별한 업무 쪼개기로 인한 비효율 발생의 현장이 하나의 찬란한 예술이 되는 데에 가담되는 짜릿함이란!


여러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비효율을 만들면 이렇게 무섭습니다.


(번외)

오전 조의 업무를 오후 조에게 인계해야 하는 시간.

오전 조 전원은 업무 노하우를 오후 조에게 전수하지 않기로 마음을 모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알아서들 나눠서 잘해보셔요 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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