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이가 열렸어! 정원에 작은 오이가 열렸다. 열렸다. 열렸다. 열리다는 말이 새삼스레 예쁘다. 오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닫혀있던 오이의 세계가 드디어 열린 것이다. 엄마, 오이가 열렸어,라고 말하는 아기의 입 모양도 자그맣게 초록으로 열려있다. 열리다에 가장 어울리는 주어는 감도, 사과도, 호박도 아닌 ’새로운 세계‘라는 생각을 해본다. 새로 열린 아기 오이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열렸으면 좋겠다. 꽃이 지고 열매와 함께 맺히는 새로운 세계.
출근길 서울역에서 왼쪽 목에 한글로 ‘오병이어’라는 타투를 새긴 서양인을 봤다. 그 청년 이름은 사이먼이다. 방금 내가 지었다. 사이먼은 왜 하필 왼쪽 목에, 가로가 아닌 세로로, ‘오병이어’란 한글을 새기게 되었을까. 오병이어가 사이먼에게 가 닿은 까닭이 궁금하다. 세종대왕님은 서기 2023년 대한민국 한복판에 사이먼이란 영국인이(추측) 오병이어란 한글을 왼쪽 목에 세로로 새기고 걸어 다닐 것을 예상하셨을까. 그걸 보는 세종대왕님의 마음은 어떨까. 뿌듯하실까 아님 쑥스러우실까. 나는 왠지 조금 남사스러우실 것 같다. 사이먼이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지나 광화문까지 걸어서 세종대왕님 앞으로 등장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의견을 여쭙고 싶다. 기묘한 사이먼의 오병이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폐하. 아, 그러고 보니 오빠와 자주 가던 평창동 스타벅스 옆에 떡볶이집 이름이 오병이어였다. 오병이어는 생각보다 흔한 단어이다.
오늘은 9월 1일이다. 매월 1일 아침 출근길, 0원으로 리셋되어 있는 후불 교통카드를 찍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린 느낌이다. 아, 새로운 세계는 이처럼 가까이에 있었구나. 오늘은 집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 지난겨울 말려서 저장해 두었던 곶감을 꺼내먹어야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새로운 곶감을 깎아 말릴 생각에 기분이 들뜬다.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