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성이 엄 씨라고. 엄만호.

by 만나는 주머니

늦겨울이지만 아직 겨울은 겨울이었다. 시합 후 급격하게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유니폼, 후드티, 부피 큰 야구점퍼를 겹쳐 입은 선수들은 쌀 한 가마니보다 큰 검은색 가방 양 옆의 배트 주머니에 야구 배트를 끼고 각종 야구용품을 넣고 지퍼를 닫았다. 가방을 멨다기보다 짊어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선수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용 야구 장비가 들어있는 상자들을 두 손 가득 쌓아서 들고 경기장 뒤편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학교 버스로 향했다. 민찬과 영은도 야구공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노란색 바구니의 양쪽 손잡이를 한쪽씩 나눠 들고 무리에 합류했다. 하늘도 민찬 옆에 서서 바구니의 귀퉁이를 잡았지만, 민찬은 오른손으로 하늘의 키가 자신의 어깨보다 작다는 것을 하늘에게 확인시키고는 물러나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매니저, 올 때는 엄마가 데려다주셨지? 학교 버스 타고 갈 거야?”

영은이 왼손으로 코를 비비며 물었다.

“아뇨, 엄마가 경기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어요. 저는 엄마 차 타고 갈게요.”

“아주 금이야 옥이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어질까. 아빠 한 분으로도 충분히 넘치고 차셨는데 엄마까지 합세하셨어. 조만간 매니저 다리 퇴화해서 없어지고 날개 생기는 거 아니야? 걷지 않고 실려 다녀서?”

영은이 하늘과 민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분인 것 같더라. 다행이지.”

민찬은 영은을 따라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근데 선배님, 양꼬치는 오늘 정말 무슨 일이래요? 훈련 왜 안 하는 거래요? 어디 크게 아프시거나 하필이면 그 아픈 데가 머리이거나, 아니면 코치 그만두시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하늘이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만들며 물었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중요한 약속이 있으신 것 같아. 아까 경기 끝나고도 계속 전화 통화 하시느라 바쁘시더라고. 엄청 깍듯하던데. 허리를 거의 폴더처럼 숙이고. 뭐, 덕분에 반나절의 소중한 자유 시간을 얻었으니까, 이유가 어찌 됐든 오늘은 넙죽 받아서 써드리는 게 대한민국 청소년의 바람직한 기상 아니겠냐.”

셋은 건물 밖으로 나가 어두워지기 시작해 가로등이 켜진 아스팔트 위를 걸었다. 아스팔트 옆의 화단에는 아직 한 겨울 내린 눈의 흔적들이 다 녹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민찬아, 저녁에 피시방 갈래? 아니면 너희 집에서 치킨 먹으면서 플스 할까?”

영은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오늘 안 될 것 같은데. 할머니 댁에 가야 해. 원래 오늘 다 같이 저녁 식사하는 날인데 시합이 잡혀서 못 갈 뻔했거든. 얼른 간다고 전화해야겠다. 주말에 놀러 와.”

“아, 그 한 달에 한 번 식사하는 게 오늘이야? 에이 친구야, 그냥 시합 끝나고 원래대로 연습까지 한 걸로 쳐도 되는 거 아냐?”

“그래도 되는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영은은 민찬에게 고지식하긴 이라고 말하며 민찬의 배를 주먹으로 살짝 쳤다. 민찬은 걸음을 멈추고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랑 마주쳤으려나.”

차가 많지 않아 한적한 주차장 쪽을 바라보며 하늘이 말했다.

“안 마주친 것 같은데. 마주쳤으면 입구에서부터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걸.”

민찬이 입김을 동그랗게 불었다.

“나도 한 세 번 본 것 같아. 너희 엄마들 옥신각신하시는 거. 보고 있으면 은근 재밌더라. 티키타카 개 쩔던데?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와 나는 콤비다, 딱 감이 오신 건가.”

영은도 민찬을 따라 허어, 숨을 내쉬며 입김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여기서 처음 만난 게 아니란 건 확실해요. 엄마가 나중에 천천히 가르쳐 주신댔는데 별로 가르쳐 줄 생각은 없어 보였어요. 최민찬, 네가 한번 물어봐봐. 나도 궁금해 죽겠어.”

“난 별로 안 궁금한데. 궁금한 사람들이 물어봐.”

민찬의 태연한 대답이 얄밉다는 듯 하늘은 까치발을 들고 팔을 뻗어 민찬의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저 멀리 주차장 구석 자리에 빨간색의 작은 자동차가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었다. 잘 닦여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자동차의 운전석 안에 긴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 엄마 티코다!”

하늘이 차를 발견하고는 손을 크게 흔들면서 ‘연두 씨 연두 씨’라고 말하며 콩콩 뛰었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여자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하늘보다 더 크게 손을 흔들며 반달 모양 눈으로 활짝 웃었다. 많게 봐도 30대 초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연두는 무릎 위로 딱 떨어지는 베이지색 코트 위에 크림색 숄을 두르고 있었다.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연두는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소화하기 어려운 스타일이지만 연두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주장, 에이스 안녕! 오랜만에 보니까 키가 더 큰 것 같아! 신생아보다 빨리 자라는 것 같은데? 신생아에게 사과해!”

민찬과 영은이 고개를 숙이며 연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연두는 활짝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고 하늘은 등 뒤의 백 팩을 내려 끌어안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늘 훈련 없는 것 같더라. 양꼬치 차 아까 헐레벌떡 나가던데?”

연두가 민찬과 영은의 어깨를 차례대로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헐레벌떡 나가는 것 어떻게 아셨어요?”

영은이 연두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차 뒤꽁무니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던데 뭘. 헐. 레. 벌. 떡.”

연두는 깔깔거리며 웃다가 민찬과 영은에게 차를 태워줄지 물었고 민찬과 영은은 학교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말하며 연두에게 인사를 했다. 연두는 그럼 3학년 돼서 만나자며 손을 크게 흔들고는 운전석으로 걸어가다가 뭔가 깜빡했다는 듯 멈춰 돌아섰다.

“맞다, 민찬아. 너희 엄.마.는 오늘 안 왔어?”

연두는 엄마라는 단어에 의미가 있는 듯 힘을 실어 천천히 발음했다.

“아까 오셨다가 시합 보시고 먼저 가신 것 같아요. 전화해 볼까요?”

연두는 과장되게 고개와 손을 저어대며 절대 하지 말라고 말하며 눈을 부릅뜨고 웃었다. 연두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하늘은 조수석 창문을 열었다.

“선배님 저 먼저 갑니다. 최민찬, 나 간다!”

영은은 하늘에게 손을 흔들었고 민찬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연두의 빨간 차가 느린 속도로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꽁무니에 진짜로 쓰여 있네. 초. 보. 운. 전.”

영은의 말에 민찬이 모자를 고쳐 쓰며 웃었다.

“근데 저 차는 티코가 아니고 폭스바겐이잖아? 아까 하늘이가 티코라지 않았냐?”

영은이 학교 버스가 주차된 곳을 발견하고 손짓하며 말했다.

“하늘이 어머님이 스무 살 무렵 운전면허를 땄을 때 빨간색 티코 몰고 다니는 대학생 언니들이 그렇게 부러웠었대. 하늘이 아버님께서 하늘이 어머님 새로 오시고 자동차 하나 사주시겠다고 했을 때도 빨간색 티코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빨간색 티코가 어딨냐. 아쉬워서 이름이라도 티코라고 부르고 싶다고 붙이신 이름이래. 티코.”

“아, 네가 저기 세상 모든 게 귀찮아 보이는 수염 난 아저씨를 아빠도, 삼촌도 하다못해 형도 아닌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영은의 손끝에 레이밴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학교 버스에 기대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엄 씨야.”

“뭐가?”

“수염 난 아저씨. 성이 엄 씨라고. 엄 만호.”

“뭐래. 그러니까, 그래서 엄마라고?”

민찬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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