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대구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위해 시골 친구들과 모였다.
내가 졸업 한 초등학교, 중학교는 학생이 적어서 20년 전에 폐교되었다.
중학교가 분교였으니 얼마나 시골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신체검사를 받기 하루 전일이다.
함께 저녁을 먹고, 대구 달성공원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이 술이 취해 있었다.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고 말을 걸었다.
친구들과 있다 보니 장난기와 영웅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아가씨 우리와 같이 한잔해요?"
젊은 여자가 싫다고 했는데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나타났다.
"지금 니들이 인간 김 00을 어떻게 보고 지랄들이냐?"
갑자기 맥주병을 들고 설친다.
대략 난감했다.
우리는 20여 명이었다.
상대방은 혼자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고 보내주었다.
3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시골 촌놈들이 대구광역시에 와서 혼쭐이 났다.
다음날 신체검사에서 나는 시력이 나쁘다고 4급 판정을 받았다.
당시 4급까지 현역이었는데, 시력이 -6.0은 면제였고 내 시력은 -5.6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대학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학사장교 모집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병사로 입대하기보다 장교가 되고 싶어서 바로 지원했다.
다시 대구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불합격했다.
정밀검사에서 시력이 기준미달이었다.
그런데 나처럼 시력이 나쁜 선배가 합격한 것이다.
비결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정밀검사를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합격할 수 있는 꼼수였다.
군에 가면 땀을 많이 흘릴 텐데 안경 쓰는 것이 불편할 듯하여 라식 수술을 했다.
지금은 라식수술을 많이 하지만, 30년 전에는 불안감이 컸다.
큰 어머니께서 눈 수술한다고 하니 처음으로 용돈도 주셨다.
라식수술은 심봉사가 눈을 뜬 것처럼 좋았다.
그리고 대학 2학년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지금은 군에서 태권도를 강제적으로 하지 않지만, 30년 전에는 태권도 훈련이 힘들었다.
20살이 넘어서 몸이 굳었는데 다리를 찢는 것은 고통이었다.
대학교 아래 위치한 태권도 체육관 관장님은 죽도를 들고 다리 찢기, 기초체력 단련을 군대보다 강하게 시켰다.
군생활 편하게 하려면 태권도 단증이 필요하다고 하여 1단을 땄다.
관장님 덕분에 학사장교 선발 체력검정을 우수하게 통과했다.
지금은 오래 달리기, 팔 굽혀 펴기,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30년 전에는 철봉이 있었다.
철봉과 오래 달리기는 나의 주종목이었다.
오래 달리기에서 체육학과 중거리 선수를 제외하고 2등을 했다.
신체검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학사장교는 대학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지급한다.
대학 3년을 기숙사에서 지냈고, 2학년부터 등록금을 학사장교 장학금으로 받아서 대학생활에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1998년 학사장교로 입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