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 장교가 되기 위해 경북 영천에서 훈련을 받았다.
1,300명이 모두 훌륭한 장교가 되기 위해 모였다.
1등에서 1,300등까지 순위가 생기고,
그에 따라 군번이 생긴다.
지금도 동기들을 만나면 자신의 군번이 빠르다고 자랑하곤 한다.
몇 년 전 성적 순위에 의한 군번 부여가 사라지고, 가나다순으로 이름 순서에 따라 군번이 부여된다.
나는 162cm의 단신이다.
다행히 160cm가 넘으면 장교가 될 수 있다.
꼭 나를 위해 만든 기준인 것 같았다.
훈련은 1개 중대에 130명씩 10개 중대로 편성했다.
먼저 중대를 지휘할 대표 후보생, 즉 중대장을 선발하는데 키가 180cm 이상으로 선발했다.
다음으로 중대장을 도울 소대장 후보생을 선발하는데 지원했다.
그런데 또 키가 180cm 이상이고,
목소리 큰 후보생을 선발했다.
목소리는 내가 큰데 말이다.
군대도 우선 키가 커야 한다.
장교 후보생들에게 정확성, 신속성을 기르기 위해 수시 내무검사를 했다.
아침 06시에 기상하면,
5분 뒤에 훈육장교가 생활관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내무검사가 이루어진다.
우리 중대 훈육장교의 별명은 '독사'이다.
생긴 것도 독사눈을 닮았고,
우리를 그렇게 힘들게 했다.
물론 훌륭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당하는 후보생들은 힘들다.
기상 후 처음 하는 것이 아침 점호 집합이다.
후보생들이 점호를 '독사'는 30cm 자를 갖고 침대 정리 상태를 검사한다.
침대 시트 및 모포 정리 상태를 체크한다.
늦게 일어나면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여 항상 벌점을 받는다.
어떤 동기생은 침대 시트와 모포 정리가 늦을까 봐 모포를 덮지 않고, 그냥 위에서 쪽잠을 잔다.
어떤 동기는 침대 시트 길이와 각도를 유지하기 위해 실로 꿰매기도 했다.
어떤 동기는 전투복을 입고 자기도 했다.
하지만 독사는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벌점을 부여한다.
훈련받는 기간은 P.X(군용 마트) 이용이 안 된다.
한 달쯤 지났을 때, 3사관 학교 생도들이 P.X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P.X 위치를 확인하고, 언제 갈 것인지 작전을 세웠다.
수시 집합이 많아서 잘못 걸리면 얼차려에 벌점을 받아야 한다.
간식을 먹어야 한다는 간절함이 얼차려와 벌점을 이겨야 갈 수 있다.
P.X 출동 작전 계획 수립이 끝나고 약 1km 떨어진 P.X로 달렸다.
생활관에 음식물 보관이 안되기 때문에 현장에서 해결해야 했다.
자유시간 4개를 현장에서 게 눈 감추듯이 먹었다.
당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았다.
이쯤 되니 대범해졌다.
호박엿 한봉을 사서 생활관으로 달렸다.
어디에 보관할지 고민하다 반합 안에 숨겨두었다.
독사 몰래 먹는 호박엿은 어찌나 달았는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더 이상 P.X를 갈 수 없었다.
며칠 뒤 다른 동기생이 몰래 P.X에 갔다가 적발되어 심하게 얼차려를 받았다.
키가 작은 나에게 가장 힘든 것은 걷기였다.
다리가 짧은데 발을 맞추어 걸어야 한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면 다리가 찢어진다.'
분열이라고 해서 중대원 130명이 발을 맞추어 행진해야 하는데, 키가 작은 사람이 가장 뒤에 위치한다.
앞 쪽은 그냥 보통 걸음으로 걷지만,
뒤에 있는 나는 달려야 한다.
직진이 아닌 우회전을 할 때는 바깥쪽에 위치하면 회전 반경 때문에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
그런데 발까지 맞추어야 한다.
그러니 땀이 삐질삐질 날 수밖에 없다.
결국 걷는 게 싫어서 병과 선택 시 보병을 희망하지 않았다.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유격훈련을 갔다.
군인들에게 유명한 828 고지의 화산 유격장이다.
유격장은 높은 고지에 있어 5월의 날씨에도 계곡물이 차가 웠다.
찬물에 샤워를 했더니 감기에 걸렸다.
다음날 레펠 훈련을 하려고 섰는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탈진이 된 것이다.
마치 김 한 장이 눈앞에 막아선 느낌이다.
현기증이 나고 앞이 보이지 않아서 손을 들었다.
"교관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관은 내가 키가 작아서 앞이 안 보인다고 생각했다.
"안 보이면 앞으로 나오면 되잖아?"
결국 탈진 증세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그늘진 곳으로 이동했다.
훈육장교가 주는 소금물을 마시며 잠시 쉬다가 정신이 돌아왔다.
잠시 거늘에서 쉬는 휴식은 꿀맛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이 돌아오자 다시 참여하라고 한다.
힘든 산악 훈련을 마치고, 복귀 행군하는 날이다.
40km, 10시간을 걸어서 유격장에 입소했는데,
다시 10시간을 걸어서 복귀한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행군하는데,
마지막 1시간을 남기고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다리 짧은 나는 완전군장을 메고 달리고 있다.
발은 까져서 피가 나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서 걷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1시간만 가면 되는데 구급차를 탈 수는 없었다.
열심히 달려서 위병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군악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위병소 앞에서 군악대가 올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화는 머리끝까지 났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여기에 맞는 말이다.
무사히 행군을 복귀했는데 점심 메뉴가 짜장면이다.
누가 식단을 작성했는지 정말 너무했다.
3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마치고,
1,300명 중 1,030명이 5만 촉광의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