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1월, 서울을 방어하는 수도방위 사령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수방사는 키가 큰 장병들을 우선 선발했지만, 나 같은 키 작은 간부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28년 전에는 자대 전입 후 한 달 동안 소대장도 병사들과 함께 내무생활을 했다.
소대장이 같은 생활관에서 잠을 자는 것은 고참들에게 불편한 밤이었다.
생활관을 돌아가면서 잠을 잤는데, "왜 소대장님이 우리 생활관에서 자냐?"라고 고참들이 후임병들을 갈굼 하곤 했다.
그러면 다음날 병장들을 불러서 혼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없지만 그때는 식기조, 군화조, 빗자루조 등 다양한 직책들이 많았다.
병장을 혼내면 다음날 일병 실세가 찾아왔다.
제발 병장들 혼내지 말라고 한다.
자신들이 힘들다고 한다.
우당 탕탕 한 달의 내무생활이 끝나고, 독신숙소로 갔다.
2인 1실이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했다.
자대 전입 후 한 달 뒤 혹한기 훈련을 갔다.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그때 우리 부대는 서울 서초구에 부대가 있었다.
그런데 혹한기 훈련을 도봉구에 있는 다른 부대로 지원 갔다.
경북 상주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서울 지리를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은 낮에는 교통체증이 심하기 때문에 밤 12시가 넘어야 훈련이 시작된다.
첫 혹한기 훈련을 지리도 모르는 곳에서 5톤 차량을 선탑해서 출동했다.
새벽이라 차가 많지 않았지만, 신호등은 여전히 작동했다.
앞 차량을 따라가는데 신호등에 걸렸다.
문제는 군사지도를 보면서 서울 시내를 이동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는데 앞 차량은 벌써 시야에서 멀어졌다.
난감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면 좋겠지만 그때는 그럴 수 없었다.
운전병이 병장이었는데 길을 모른다고 한다.
'이것이 소대장 길들이기인가?'
알면서 모르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할 수 없이 그냥 직진하며 앞으로 갔다.
10분쯤 가다 보니 수송관이 찾아왔다.
수송관의 인솔하에 훈련 장소에 도착했다.
호랑이 중대장이 온갖 욕설과 조인트가 날아온다.
훈련에 대한 교육 없이 출동하고,
전입 한 달 된 소위에게 혼내는 것만이 올바른 길인가?
무참히 짓밟힌 자존심은 피곤해서 어디로 가고 없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벌써 새벽 3시다.
철모를 쓰고 차량 선탑을 하고 오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졸고 있었다.
지원부대 대대장님 갑자기 차량이 옆에 붙었다.
어떻게 졸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 눈도 밝으시다.
숙영지로 복귀해서 대대장님 텐트로 호출한다.
이번에는 대대장님에게 혼이 났다.
첫 혹한기 훈련을 과하게 경험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지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은 주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