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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록 Oct 29. 2021

제 글의 삽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린 젊은 엄마입니다.’ 글을 마무리하고 이 글에 맞는 그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글이 너무 무거워서 한동안 읽고 싶지 않았는데 그림을 넣으려고 하는 수 없이 계속 읽고 있어요. 아주 징글징글합니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이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시킬까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기네요. 제목의 목차만 봐도 약간 숨이 막힙니다. 그림도 글만큼이나 창작의 고통이 따르거든요.      


하지만 그림은 스케치가 나오고 물감을 찍기 시작하면 글보다는 빨리 끝이 납니다. 저는 아이패드가 아닌 리얼 물감을 쓰기 때문에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번 글 까지는 아날로그로 1차 삽화 작업을 하고 출판을 하게 되면 아이패드로 그림을 다시 그려서 넣으려고 합니다.      


저는 사실 물감 작업이 좋습니다. 물감 값, 종이 값, 붓 값도 들고 번지고 마르고 찢어지는 불편함마저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예술작업 과정을 좋아합니다. 연필 스케치를 하는 동안 지우개 가루가 책상에 수북하게 쌓이고 물감을 꺼내어 붓에 바르기 시작하면 손에도 언젠가 모르게 물감이 슬슬 발립니다. 어쩔 땐 그림을 그리다가 코를 문질렀는지 코에도 물감이 묻어있고요. 그렇게 종이에 심사숙고해서 그린 그림과 발린 물감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면 그 작품이 마를 때까지 요리보고 조리 보며 웃습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온 날에는 책상 한가운데 그 그림을 세워놓고 하루 종일 오며 가며 보고 또 보면서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행복해합니다. 그런 그림이 한 장, 두 장 모여 묶여있는 스케치북은 저의 보물이지요. 아이들도 손을 닦고 물기를 다 말린 후에야 살살 들고 볼 수 있는, 침 튀길 까 봐 보는 동안은 침묵하도록 약속되어있는 귀한 물건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을 발표회를 위한 강당 무대 배경 제작을 한 반에 한 명씩 나와서 같이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열 명 정도 되는 친구들과 교복 블라우스를 둥둥 걷어 올리고 엄청나게 큰 무대 배경을 그리면서 여기가 천국보다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어마어마하게 큰 종이에 물감을 쏟아부어 페인트 붓 같은 걸로 그리고 칠하는데 좋아서 죽을 것 같더라고요. 우리 열 명의 몸을 쫙 펼쳐서 이은 것 보다 큰 그림이었으니 교복 여기저기와 얼굴과 팔과 다리에는 여러 색깔의 물감이 온통 발라져 있었는데 그 물감을 씻어내기가 정말 싫었어요. 문신처럼 계속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지요. 희열이 담긴 그 색깔과 묻어있는 모양까지 저는 정말 좋았거든요.            


그 이후로 대학을 가고 여행을 다니면서도 저는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어요. 그냥 너무 좋아서, 내 마음과 생각을 이미지와 색깔로 표현하는 게 너무 좋아서 멈추지 않은 거예요. 결혼 전에 인도 여행을 하면서 그린 그림을 결혼 피로연 장소에 전시를 했었는데 미술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갔다 온 오랜 친구가 저의 그림들을 보더니 이 말을 하더군요.

“잘 그리는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그리네. 계속, 계속, 그리네.”

저에게는 이 말이 칭찬처럼 들렸어요. ‘계속’하고 싶은 무언가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거고 계속하다 보면 어느 경지에 이를 테니까요.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도 저는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기록해놓은 노트가 열 다섯 권이 넘어요. 때로는 작은 노트에 간단히 졸라맨으로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큰 종이에 물감을 입혀 그리기도 하면서 육아를 했어요.

‘어제 있었던 그 이야기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그릴까?’를 생각하면 고단하고 지루한 일상이 순식간에 행복해졌어요.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탄생시킨 그림은 저에게 정말 넓고 깊은 행복을 주었고요.  

   

그림은 제가 만들었지만 완성된 그림이 제 삶에 가져다준 활력, 설렘, 만족감, 희열, 삶의 이유 같은 것은 그림이 만들어서 저에게 준 것이었어요. 작품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서 자기 일을 하는 것 같았죠.      


지금 그리는 삽화는 아픈 이야기의 그림이기 때문에 행복과 희열보다는 위안을 주는 것 같아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많이 아팠지? 힘들었지? 애썼어... 아이고, 너무 애썼어...’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의 마지막 이야기까지 그림을 잘 완성할 수 있도록 힘을 내볼게요.

    

날씨가 너무 좋은 바람에 밖에 나가 햇볕을 쬐면서 스케치를 할까봐요.

여러분도 따뜻한 가을볕 듬뿍 쬐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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