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포장마차의 휘장을 걷자 내내 잊고 있던 선득한 한기가 뺨에 와 닿았다. 꿈 속을 헤매다 불시에 꿈 밖으로 쫓겨난 사람처럼, 우리는 조금 놀란 듯, 비틀거렸다. 언뜻 스친 그녀의 머리칼에서 얼음 냄새가 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노르웨이의 숲 속 풍경이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가로수 구석, 쓰레기봉투에 한데 모아놓은 낙엽의 잔해가 웅크린 사내의 등처럼 보였다.
-밤안개일까?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얼음 알갱이가 네 머리카락을 적시고 있어.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 왔다. 나는 그녀에게 외투를 건넸다.
-괜찮아. 이런 서늘함 너무 좋으니까. 그나저나 술 냄새 많이 나지?
그녀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짧게 답했다. 그녀가 취하지 않았다는 걸, 취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가 고집스럽게 술을 들이켜려 했던 이유를, 무언가 말하고 싶어 오물거리던 입술을, 그러나 내심 아무 말도 해주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가 짓고 있던 모든 표정을 나는 방관했다.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쏟아지며 그녀의 그림자를 쓸어내리고 있다. 앞서 걷고 있던 그녀는 마치 밤안개에 흠뻑 젖어 시계가 흐려진 창으로 응시하는 바깥 풍경처럼 너무도 흐릿하게만 보였다.
그녀와의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이뤄지곤 했다. 그녀가 원하면 나는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동안 연락이 두절되는 그녀에게서 한 달 만에 급작스럽게 전화가 왔고, 오후에 별다른 약속이 없었던 나는-물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늘 시간을 비어둔다-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녀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만남을 꽤 오랜 시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우리의 만남 자체가 참으로 모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단 하나 명백한 사실은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이런 식으로라도 이어가고 싶었다는 것이다. 헤어질 생각을 하면, 그녀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서 한 방에 사라져 버리는 때를 상상하기라도 하면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 그녀의 뒷모습을 한 걸음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며 “저, 여자 참 안개 같군.” 하고 생각했던 그 날의 쓸쓸하고 애잔한 기억들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녀 없이도 여전히 이렇게 마른 장작의 모습으로나마 살아가고 있다.
*
차가 일산대교 위에 막 올랐을 때, 청명한 목소리의 기상캐스터의 예보대로 한 층 더 짙고 규모가 큰 안개 가다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출근길엔 일산대교에서만 삼십 분 정도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 내게 이 모든 일들은 익숙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개가 짙어지는 날이면 체감 정체 시간이 한 시간은 족히 넘는 것 같다. 가끔 이렇게 안개가 낄 때마다 나는 사라진 그녀를 생각한다. 햇수로 이 년 전,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면 이렇게 안개 속 풍경처럼 모호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이별이 그렇게 요란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당시엔 알지 못했다. 그렇게 특별하지도, 그렇게 누추하지도 않게,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으로 마주했던 이별. 우리는 그만 만나자는 그 흔한 헤어짐의 말 한마디 없이 이별했다. 시작이 모호했던 것처럼, 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도 그랬다. 늘 그랬던 대로 익선동에 자리한 정갈한 한정식 집에서 백반을 먹었고, ‘타임’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에서 마른 잎처럼 부서져 가는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술 한잔 하고 가자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고픈 마음에 자주 가는 단골 포장마차에 들러 곰장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그 날 그녀가 유일하게 낯설게 느껴졌던 건 다른 날보다 유난히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리우드 가십 뉴스에 이어,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엄마 이야기를 꺼내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입을 벌려 크게 웃더니 중얼거렸다.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어.
어쩌면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또 다른 세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나는 그것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문득 비릿한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이제 뭐할까?
-이렇게 걷는 거?
-자긴, 나랑 자고 싶지 않아?
-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반격에 귓불이 붉어졌던가. 농담이야, 농담.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빙긋이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어떤 사내의 밀침에 간당간당하게 이어져 있던 그 연결고리마저 끊겼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제 각기 어정쩡한 포즈로 다시 거리에 섰다.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리 읽으려 해도 읽을 수 없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히 내게 더 잘하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던 그녀는, 그저 무심한 듯 그러나 한없이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녀는 구체적인 날짜를 거론하며 다음을 기약하기까지 했다.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날까?
-응?
반질하게 닦인 구두코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코끼리가 보고 싶어.
-코끼리?
-응. 코끼리의 기다란 코가 보고 싶어. 과자를 주면 정말 코로 받아먹는지 알고 싶어.
-그래, 그렇게 하자.
-그날엔 운동화를 신고 만나. 자기가 청바지를 입고 온다면 더 멋질 것 같아.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에 안심이 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안한 마음을 한 구석에 남겨둔 채 그녀의 손을 놓았다. 다른 날 보다 조금 이상했던 건 헤어지던 순간만큼은 늘 해맑게 웃어주던 그녀가 등을 보인 채 돌아섰다는 것. 그리고 조금 더 실루엣이 흐릿해져 이제는 안개처럼 느껴졌다는 것뿐이었다.
*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오라는 그녀의 연락은 오지 않고 이른 겨울을 알리는 차가운 바람을 동반한 무심한 11월이 왔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낯선 남자가 전화를 받았고, 그 낯선 남자는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소리쳤으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면 반쯤 죽여놓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녀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때마다 초조해 견딜 수 없으면서도 묵묵히 참고 지냈던 나날들, 언젠가 한없이 기다려주기만 한 나란 사람에게도 뿌리내릴 기회를 주리라 기대했지만 그녀는 지금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안개처럼 떠돌고 있다. 시작도, 만남도, 심지어 이별도 이렇게 모호할 수밖에 없게 한 그녀를 과연 나는 원망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여느 때처럼 회사 업무에 몰두했다. 하지만 주말이면 씻지도 않은 채 방구석에 처박혀 지냈다. 동상에 걸린 발처럼, 몸의 감각은 점점 무감해져 갔다. 어쩌면 코끼리의 기다란 코가 보고 싶다고 했던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안개가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의 되새김질처럼 더디게, 더디게 차량들이 조금씩 안갯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라디오를 켜자 기다렸다는 듯 일산대교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오중 추돌 사고가 일어났다는 속보가 튀어나온다. 차량 복구 작업이 더뎌져 서울로의 진입이 늦어질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나는 지금 일산대교의 어느 지점에 이렇게 멈춰 있다. 사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사라지고부터 나는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헤매길 반복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면에서 안심이 됐다. 이렇게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서 말이다. 이 도시 전체가 안개의 위력에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어디에선가 그녀 역시 이렇게 안개처럼 부유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깊이 뿌리내렸길. 그렇게라도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길, 제발 그럴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