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그를 죽였어.”
질기게 울리던 스마트폰 액정을 터치해 왼쪽 귀에 갖다 대고 여보세요, 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K의 냉정하리만큼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죽이다’라는 무지막지한 동사를 이렇듯 평화롭게 내뱉고 있었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일주일 전쯤, 그를 죽여 버릴까,라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계절의 경계선이면 어김없이 출몰하는 고열 증세 때문이었다. 입에 물고 있던 체온계의 붉은 눈금은 거짓말처럼 3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능한 의사라고 엄마의 권유대로 찾아갔던 병원에서 조제해준 약마저도 소용없었다. 무언가 다른 처방전이 필요했다.
“평화로워. 더할 수 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밑도 끝도 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말을 재치 있게 받아넘기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진지하고도 견고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의심의 새순을 뽑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 .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더라. 일주일 전, 병원 복도에서였다. 그녀는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다. 쑥 들어간 볼, 충혈된 눈, 가느다란 두 다리로 애처롭게 중력의 힘에 버티고 서서 쓸쓸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몰골은 몰라보게 황폐해져 있었다.
-밥 먹자.
그때 나는 유령처럼 서 있는 그녀의 손을 끌어 병원 앞 순대국밥집으로 향했다. 인상 선한 아주머니에게 순대국밥 두 개요,라고 일방적으로 말해버린 것은 따뜻한 것이라도 먹여 그녀의 빈 곳을 데워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대국밥의 국물만을 멀건이 바라볼 뿐, 그녀는 끝내 아무것도 삼켜내지 못했다.
-그의 뇌는 완전히 죽여 버렸다고 하는데 거짓말처럼 심장은 뛰고 있어. 아이러니하지 않아?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말이야. 거식증이래.
나는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그는 그녀의 오랜 연인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의 소개로 만난 그들은 3년을 미친 듯이 연애했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마땅히 양가 어른과 지인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변함없이 헛된 희망 따위를 안겨준다는 것이 그녀에게 가혹한 일임을 알고 있다. 깨어날 수 있을 거야, 라는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운 위로가 독이 될 테니까. 그녀가 끝내 밥 한 숟가락을 뜨지 못하는 이유가 거식증 때문이라니.
그녀가 이기지도 못할 술의 힘에 기대, 어떤 언어를 소리 내어 발화하고 싶어 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소주 한 병이 약해빠진 식도를 깎아내리려고 공복의 위를 뒤집어엎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노란 위액까지 거침없이 쏟아내고서야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기침을 내뱉듯 말했다.
-내 손으로 죽여 버렸으면 좋겠어...
그 말을 뱉어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삼켜내지 못한 그녀의 배설치고는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나는 얼떨떨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러고 나서, 병원 앞 순대국밥집으로 달려가 순대국밥을 세 그릇이나 먹어 치웠어.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거든.”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숨죽여 섧게 울고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잘했어.”
너무나 애처로웠지만, 그러나 이놈의 고열 증세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어서 나는 아이를 어르는 엄마처럼 간신히 그녀에게 답했을 뿐이다. 잘했어,라고. 그 말은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언어였다. 정말 순대국밥을 세 그릇이나 먹어치웠을까? 그를 정말 죽여 버렸을까? 지금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의 의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화는 끊겨 버렸다.
그 순간, 액정의 밝은 빛이 마술처럼 4월 1일 0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디지털 숫자, 그 빛나는 신호를 들여다보며 나는 거짓말처럼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내게 필요한 또 다른 처방전은 어쩌면 깊고 깊은 잠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이럴 수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깊은 잠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 들면서, 나는 그녀가 내게 내뱉은 그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심이기를 거짓으로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