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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31. 2020

유령작가 이야기

글쓰기 노동자의 자세

나는 한때 유령작가였다. 

전업작가가 되기로 마음 먹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돈 계산에는 젬병인 내가 보기에도 소설을 써서 먹고 살기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장편소설을 계약하면 적게는 100만원 많게는 300만원의 선인세를 받는다. 소설가는 이걸 가지고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 하나의 소설만 쓴다. 만약 소설가가 다른 일 없이 장편 쓰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그런데 불행하게도 출간한 소설이 별다른 반응을 못 얻어 1쇄에서 머문다면 이 소설가의 연봉은 많이 잡아야 300만원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비현실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따라서 전업작가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소설 이외의 다른 일들, 그러니까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을 무작정 많이 해야 한다. 

내가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대필 시장의 규모가 제법 컸다. 책을 한 번 내보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그 모든 사람이 다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니 자연스레 대필작가, 다른 말로 하자면 유령작가에 대한 수요가 생기는 것이다. 일종의 글쓰기 암시장인 셈인데 그 안에서도 인정을 받으려면 몇 가지 덕목이 필요했다.


우선 입이 무거울 것. 그 다음에는 손이 빠를 것. 마지막은 글솜씨가 좋을 것.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원작자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심법을 가질 것!


나는 선배의 소개와 추천으로 유령작가가 되었다. 암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대필 작품은 최대한 빨리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행히 나는 손이 빠른 편이었다. 게다가 글쓰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거진 두 달에 한 편씩 뚝딱 쓰곤 했다. 

에세이부터 자기계발서까지, 그리고 가끔은 전문가의 실용서적까지 몇 권의 책들이 내 손을 거쳐 서점에 깔렸다. 물론 나는 유령작가였기에 저자가 되지는 못했다. 내가 손을 댄 책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 한 유명인의 작품도 있었다. 

대필은 그나마 작업비가 후했다. 글쓰는 비용에 비밀유지비용까지 더한 결과였다.


유령작가가 되어 남의 글을 쓰는 틈틈이 내 소설을 썼다. 잠을 줄여가며 썼다. 변기에 앉아서 아이디어 정리를 했다. 나는 그 시절 그 밤과 새벽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 소설을 쓸 때야말로 나는 유령에서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 겨우 한 두 문장만 쓰고 잠든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내 꿈은 단 하나였다.

마음껏 소설을 쓰는 것.

지금은 그 꿈을 이루었다.




문학이나 글쓰기를 전공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예술'을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창의적인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누군가가 예술가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소개할 때 '엔터테이너'라고 한다. 내 목표는 독자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니까.


장르 소설가에게 있어 이런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생존 여부가 갈리게 된다. 창작자에게는 나름의 고집과 철학이 있어야 하지만 그걸 관철하기 위해 생계를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말리고 싶다. 순수하고 뛰어난 하나의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선배와 후배들을 종종 본다. 모름지기 예술이란 가난과 궁핍에서 나온다는 믿음 아래 오늘도 근근이 살아가며 피와 땀이 서린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


내게는 먹고사는 일이 먼저다. 소설은 평생의 꿈이자 행복이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내 삶을 갉아먹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맞다. 내 가족의 굶주림을 담보로 소설을 써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원하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이 글쓰기 노동자의 숙명이다. 

유령작가 생활마저 즐겼던 이유는 그걸 통해서 내 소설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밤과 그 새벽을 기억한다.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던 나날이었지만 소설을 쓸 수 있기에 한없이 행복했던 날들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다양한 분야의 글을 아주 '많이' 쓴다. 시나리오도 쓰고, 에세이도 쓰고, 작법서도 쓰고, 가끔은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소설도 쓴다. 강의도 한다. 그런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겨우 살아간다. 장르 소설이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 노동자로 늘 중노동을 하는 사이 고급 취미 생활을 누린다는 생각으로 장르 장편소설을 쓴다. 


이 취미 생활은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도무지 포기하거나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두 번째 장편소설인 <소용돌이> 작업을 하면서 이 기쁨을 아주 충만하게 맛봤다.

<소용돌이>는 내 소설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정통 호러 소설인 <소용돌이>의 여러 에피소드 중 몇 가지는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것도 내가 직접 보거나 들은 것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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