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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24. 2023

쉬어가자고, 내가 내게 말했다




근황을 묻는 장거리 전화가 왔다

나는 문을 열어두고 며칠 빗소리를 들었다 했다 

비 그친 해안도로에 쪼그리고

거북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그 이야기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볼만한 구경치고

고독이 이렇게도 느린

이 헤엄을 배우기란 쉽지 않다 

땅거죽에 깔린 가슴으로

마음을 누르며

부글거리는 체온이 식지 않게 

등이 된 포물선 위에 별빛 반지라운

밤을 홀로 보낸다 

이러면 귀갑(龜甲)까지 붉어오는

부끄러움이 이국(異國)을 이룰 때인데

눈을 내리깐 자의 눈빛 

발을 뒤로 저으며

가장 화가 나는 곳으로 가고 있는 근황을

어떻게 이야기하리


   

슬럼프, 황학주 -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쓰러졌던 날을 기억한다. 역무원들의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 것임을 예감했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쓰러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불온한 예감은 안타깝게도 꼭 들어맞았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공황장애였다. 원래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콤비예요, 라고 의사가 말했다.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의사를 향해 나는 슬쩍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콤비군요. 죽을 것처럼 괴로워도 공황장애로 죽은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이번에 한 말은 농담이 아니라 위로였으나 나는 조금도 안심하지 못했다. 죽을 정도로 괴로운데도 죽지 않는다니, 마치 형벌 같았다. 

그즈음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악의적인 어떤 존재가 내게 진하고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는 것만 같았다. 서러웠다. 그리고 아팠다. 무섭기도 했다. 내가 약하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나는 비난의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원망할 사람도, 원망할 이유도 찾지 못해 결국 스스로를 원망하고 질책하고 혐오했다. 우울증을 앓는 것도 내 탓인 것만 같았고 공황장애를 앓는 것도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남 탓 좀 하고 살 걸, 왜 그랬나 싶다. 성질머리 더러운 직장 상사 탓도 하고, 맨날 틱틱거리는 동료 탓도 좀 할 걸. 내가 그토록 비난했던 그 옛날의 나에게 미안해서, 가끔 눈물이 난다.


십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꼬옥 한 번 안아 줄 것이다.


공황발작으로 세 번인가 네 번째 쓰러졌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아주 크게 넘어졌다는 사실을. 결승선은 저 만치 떨어져 있고 경쟁자들은 너도 나도 나를 앞서 가는데 나 혼자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순간. 아니면 무중력의 공간에 갇힌 것만 같은 순간. 그때가 그랬다. 나는 일어설 수도, 다시 걷거나 뛸 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속삭였다. 넘어진 김에 그냥 아예 드러누워 버리라고. 까짓 것 아픈 척 쉬어버리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진짜 누웠다.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등껍질 속으로 숨은 거북이처럼 누가 말을 걸어도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외로웠다. 외로웠으나, 그 외로움만큼 단단해졌다. 나는 한 번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걱정했다. 기우였다. 햇살 아래에서 늘어지게 낮잠 한숨을 자고 일어난 듯 나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고, 이윽고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가끔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한다. 


그때 내게 쉬라고 말해 준 이가 십 년 후 미래에서 온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 꼭 마음이 시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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