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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27. 2023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써의 두통





내게는 오랜 적이 있다. 두통이다. 편두통의 고통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아는 모든 어휘를 동원한다 해도 말이다. 나는 꼭 오른쪽 옆머리가 아픈데 바로 그곳에 보이지 않는 딱따구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편두통이 극심할 때는 모든 걸 의심하게 되는 법. 옛날 한 추레한 남자는 뉴스 생방송 중에 뛰어들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했는데 그이가 편두통을 앓았다는 말을 듣고는 단번에 그 행동을 이해했다. 차라리 도청장치가 있었으면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검사 결과는 언제나 깨끗했고, 그랬기에 항상 ‘신경성’ 내지는 ‘긴장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는 편두통 때문에 죽은 이는 없다고 했다. 대신 편두통을 앓다가 누군가를 죽인 사람은 의외로 많다고도 했다. 까닭 없는 통증은 살의를 품게 만든다. 길고 긴 새벽, 불면의 바다에서 설핏 잠에 빠지려는 순간 편두통이 찾아오면, 그래, 누군가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어진다.

우울감과 무기력, 그리고 분노와 외로움이 통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두통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실체를 얻어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 바로 두통이다. 두통의 전조가 밀려올 때면, 이를 테면 눈이 뻑뻑하다거나 기분이 가라앉는다거나 귀에서 이명이 들리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만 채로 침대에 눕는다. 그것만이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고통에 대항할 유일한 방편이다. 가끔은 그런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통증은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신이 준 경보기라는 말. 참으로 너그러운 신에게 감사를. 아멘.


그렇다면, 나와 죽음 사이는 얼마나 가깝기에 이토록 크게 울리는 경보기를 달아놓은 걸까?


아마존의 한 부족은 자해를 하는 방식으로 용기를 증명해 보였다고 한다. 그들은 고통이 곧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렇지. 죽어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그들 생각이 맞겠구나 싶다가도 편두통의 한가운데에 놓이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았다. 다행이다. 머리가 너무 아파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아니었다면 둘 중 하나는 했을 텐데.

그럼에도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나는 편두통에 대한 농담 몇 개쯤은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누군가가 머리가 많이 아프냐고 물어보면 지금 당장 전동 드릴로 관자놀이를 뚫어보라고 말한다거나, 의사가 1에서부터 10으로 두통의 세기를 표현한다면 몇이겠느냐고 물을 때 18은 안 될까요, 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농담을 한다는 건 살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실없는 말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주기적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내가 존재함을 편두통을 통해 확인한다. 내 삶이 나비가 꾸는 꿈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면 영화 속 설정처럼 거대하고 치밀한 시뮬레이션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싶었는데 편두통이 그런 시시한 바람을 단박에 깨줬다.

보이지 않는 딱따구리, 내 평생의 원수, 적대자, 나쁜 놈, 개자식, 해삼, 멍게, 말미잘, 덜 말라도 악취를 내뿜는 걸레 같은 편두통은 오늘도 나를 괴롭힌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난, 살아있다.

진통제를 몇 알 먹고 눈을 좀 감고 있어야겠다. 편두통이 부디 그 정도에서 물러가주길 바랄 뿐이다. 


편두통의 정도로 힘을 증명하는 부족이 있다면 나는 아마 추장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내가 간신히 생각해낸 시답잖은 농담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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