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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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전공하고 처음 심리상담소를 차렸을 때, 나는 1년도 되지 않아 한계에 봉착했다. 내담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카운슬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담자는 자기 방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돼 자신을 찍고 있다고 했고, TV에서도 자기가 나오며, 길에서는 검은색 차가 따라온다고 했다. 심지어 상담소에 와서도 카메라가 숨겨져 있는지 확인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담자가 왜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지 심리적인 이론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전부였다. 내담자가 매주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면, 나는 위로하고 공감하며 함께 바라봐 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에 대한 회의감, 미안함, 상담사로서의 신뢰가 무너지는 걸 발견했다. 이런 내담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머리에 괴상한 도구를 쓰고 외계 행성과 수신을 하고 있다는 학생. 수시로 죽으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여자. 상담 중 이중인격자처럼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내담자 등등 이러한 경험은 나를 무능한 상담사로 만들었다. 도저히 내담자를 만날 수 없었고,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지 갈등이 생겼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고통 속에 있는 내담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년간 나는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눈만 뜨면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지 고민했고, 꿈속에서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지내온 시간이었다. 그 결과 나는 인지치료, 미술치료, 연기치료, 명상최면치료, 명상치료 등 내담자의 증상에 맞는 수십 개의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미숙한 부분도 있었으나, 지속 보완하며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완성해 나갔다. 그 후로 나는 어떤 내담자도 두렵지 않았다. 조현병, 피해망상, 분노조절장애, 반사회성 장애 등등 정신과 약을 10년 이상 복용한 내담자도 심리치료를 받은 뒤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심리치료를 하면서 언젠가는 사례집을 발간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아들인 송아론 작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송아론 또한 나에게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상담소에서 일한 시간이 있었다. 자기 일을 잠시 멈추고 상담 사례집을 쓸 거라고 말했을 때, 잘됐다고 생각했다. 송아론 작가가 빨리 사례집을 마치고자 했는데 상담이니, 강의니, 시간이 부족해 오히려 내가 따라가질 못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사례집을 쓴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또한 사례집을 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내담자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이들을 치료하면서 나 또한 성숙해지며 삶의 깨달음을 얻었다. 심리 질환으로 인해 힘든 분들이 이 책을 읽고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상담을 공부하는 분들에게도 현장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사실 나는 심리상담을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에서나 보던 피해망상이나 공황장애, 환청, 환시, 등은 절대로 치료할 수 없는 증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심리치료를 한다고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다. 그런 내가 상담을 배우기 시작한 연유는 오로지 ‘글’ 때문이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심리에 관한 공부를 하면 창작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고백하건대 실은 당시 여자 친구와 헤어져 도무지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였다. 정말로 죽을 만큼 글이 잡히지 않았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돌파구를 심리상담 공부로 정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다음에 여자 친구를 사귀면 이를 활용해 잘 헤쳐나가겠다고 굳게 다짐했건만, 난 그 후로 여자 친구와 두 번이나 헤어졌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심리상담이 이성 친구를 사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나요?
두 번이나 헤어진 녀석이 하는 말이라 신뢰할까 싶지만,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심리상담에 대해 알게 되면 인간관계에 대해 폭넓은 이해가 생긴다.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지 시야가 확 트인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헤어졌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하겠다.
이론과 실전은 다르거든요.
한마디로 나는 이론을 실전에 적용시킬 만큼 깨우친 사람이 아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상담사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에게 심리상담을 배운 후 한동안 상담소에서 일했다. 온라인 상담도 많이 했는데, 그때 느꼈던 건 많은 사람이 심리상담에 관해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도 어머니에게 배우기 전까지는 그랬으니 당연하다. 그래서 이번 사례집을 통해 많은 분이 상담소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떤 심리치료를 하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례집에는 30가지 이상의 심리치료 기법이 들어 있으며, 17명의 내담자를 증상별로 구분했다. 또 심리치료 과정 중 궁금한 게 있으면 어머니에게 묻고 답변받은 내용을 그대로 적었다.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부디 이 사례집이 도움 되었으면 좋겠다. 심리치료를 받으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심리상담을 배우기로 한 후, 나는 사람들과 함께 1년간 공부를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수업은 늘 정해진 시간에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이론을 배웠고, 두 번째는 내담자를 치료하는 실습을 했다. 실습하면서 느꼈던 건 사람들은 저마다 상처나 아픔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더 심리상담에 관심 있어 보였다.
실습 시간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밀턴 에릭슨의 명상최면이었다. 서로 짝을 지어 상대방의 트라우마를 없애주는 수업이었는데, 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신기했다. 예를 들어 한 선생님은 성추행을 당할 뻔한 적이 있어, 엘리베이터에 남자랑 타지 못했다. 남자랑 단둘이 있으면 긴장되고 식은땀이 났다. 그런데 명상최면 실습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집 남자랑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생님은 남편이 감성적이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검사를 하고 보니 자기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감성과 이성이 만나 결혼을 했으니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솔직히 트라우마라고 할 게 전무했다. 가장 힘든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힘들어요, 라고 말하는 건 요즘 말로 ‘갑분싸’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창피했다. 다들 심각한 고민과 치료를 동반하며 수업하는데, 여자 친구와의 기억을 없애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람이 힘들어하는 건 경중이 없다. 어떤 사람은 A라는 일에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크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걸 나는 6년이나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1년 동안 수업을 한 후, 나는 상담소에서 업무를 하기 위해 첫 출근을 했다. 사적이었던 ‘어머니’가 공적인 ‘원장님’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였던가. 수업 때 그렇게 멋지고 존경스러웠던 어머니의 현실 민낯을 보게 되었고, 나는 첫날부터 직격탄을 맞았다.
※ 지금부터 어머니의 호칭을 ‘원장님’이라고 합니다. 또한 내담자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원장님 그게 말이 돼요?! 우리 잘못이라뇨.”
“그래요, 왜 우리를 쌍으로 나쁜 놈을 만들어요!”
“엄마! 신고해요, 신고!”
한마디로 제대로 싸우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 상담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나는 고성과 괴성에 문 앞에서 굳어버렸다. 원장님의 받아치는 소리가 들렸고, 더 크게 맞받아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이어졌다. 들어가서 싸움을 말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도 저도 못 하며 서 있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너! 다시는 이 상담소 오지 마! 알았어!?”
“여기 사이비야, 엄마!”
“맞아,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다섯, 여섯, 일곱… 그러니까 원장님은 무려 7대 1로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현관문 앞에 멍하니 서 있자, 사람들은 욕을 하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이 드신 할머니와 비교적 젊은 여성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상담소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유, 답답해! 사람들이 말을 들어 먹어야지.”
“왜 그런 건데요?”
“말하려면 길어. 애가 지금 누구 때문에 저렇게 된 건데.”
원장님이 말하지 않아도 대강 짐작이 갔다. 수업 시간에 가장 강조했던 것 중 하나 ‘환경치료’. 그걸 하다 이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심리상담에서 환경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부터 사례를 들고자 한다.
심리상담 사례집 <벼랑 끝, 상담>이 출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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