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가능한 결말. 평안하지만 재미는 없다
#1
살아오면서 이렇게 평안한 적이 있었나 싶다.
유년시절에는 아버지의 알콜중독과 가정폭력이 있었고,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인한 경제적인 어려움, 대학생활이 있었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았다. 회사를 끈덕지게 버티고 버텨 13년이 지나고 있다. 그 와중에 동생은 자살을 했다.
지금은 저런 것들을 다 지나고서, 아이들도 제법 많이 컸고, 나의 회사생활도 어느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었고, 누군가 크게 죽거나 다치는 사고만 나지 않는다면 꽤 근사하고 행복한 하루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2
심지어 마음까지도 평안하다. 더이상 회사에서 일이나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인간관계로도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일단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내가 잘 풀리고 싶다는 욕심과 기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욕심과 기대 이것들을 좀 많이 내려놓았다. 본능적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이 이렇게 행동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잘하고 싶다, 더 잘 지내고 싶다, 외롭지 않고 싶다 등등의 욕구를 내려놓고 나니 그냥 모든 것이 심플해졋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되고, 일이 힘든 것에 대해서는 예전처럼 엄청나게 완벽히 잘하려는 마음이 덜하기도 하고 그동안 다져온 내공으로 중간만 해도 어느 정도 퀄리티의 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떠오르기만 해도 마음이 아리는 친구들과의 기억도 놓아주었다. 그냥 잠시 나에게 머물다 좋은 추억을 남겨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인연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릴때마다 그냥 고마워, 라고 말하고 놓아주려고 노력한다. 더이상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도 없다.
#3
드라마도 봤던 드라마를 보고, 게임도 했던 게임을 한다. 결말을 알고 있어야지만 마주할 수 있다. 그동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스포츠 경기는 못본다. 드라마도 재탕만, 게임도 재탕만 한다. 일도 하던 것을 하는 것으로 선택했고, 모든 것을 최대한 내 예측 가능 범위 내에서만 행동하도록 생활이 심플해졌다.
마음 뿐만 아니라 생활 또한 단조로워 돌발상황이 생길리도 없다. 그냥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가 길어졌다 짧아짐을 보고, 달이 변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렇게 딱 꼭 해야하는 일만 해왔다. 그러다보니 이따금씩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지나가서 숨을 쉬기도 힘들만큼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럴 떄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이라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은 같았다.
퇴근후에 아이들의 이런저런 것들을 해준 뒤, 빨리 저녁 8시가 되기만을 바라며 시계를 쳐다본다. 그리고선 약을 먹고 9시에 잠든다. 이것이 나의 반년간 반복된 일상이었다.
#4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싶은 것고, 가고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무척 많았다. 대단한 일을 해보고 싶었고, 성공도 하고 싶었고 그래서 항상 공부하거나 배우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더이상 하고싶은 것이 없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다던 버킷리스트를 더이상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이고 상처였다. 생각해봤자 안되었던 것들. 더이상 상처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예 바라지 말자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러다보니 배움에 대한 욕구도, 공부도, 더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것에도 서서히 멀어졌다. 그냥 그날 하루에 만족할 만큼, 에너지가 되는 만큼을 하고 나면 그 이상의 나를 바꿀만한 선택을 더 할수가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5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때의 내 마음과 머릿속은 정말로 시끄러웠다.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슬펐다 기뻤다. 벅차오르는 감정과 실망감, 분노와 기쁨 이런것들이 쉴새없이 오갔다.
사람들을 참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상처도 받았다. 그래서 늘 원하던 것은 마음이 평안이었다. 내 안의 소용돌이의 기분들, 기대들을 turn off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해질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심리학과 뇌과학, 철학 등의 책들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평안의 날들을 살고 있는 지금 깨달았다. 예측가능한 대로 행동하면 예측가능한 결말만 볼 수 있다는 것. 내가 가능한 범위로만 살아가니 내가 가능한 범위까지만의 삶이 펼쳐진다. 늘 비슷한 패턴의 그런 시간들. 그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재미가 없다고나 할까. 맛이라 비유를 한다면 맹물을 마시는 듯한 無맛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재미가 참 없다. 스트레스가 없지만 재미가 없다.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은 내게 욕구가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힘들때도 있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좋은 감정들 재미와 기쁨, 벅참 등등을 얻을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말도 안되게 성공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려면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6
한 두어달 전부터 가끔씩 예측 가능 범위를 넘어서는 상황을 겪게 되었다.
첫번쨰, 친구의 스몰 웨딩을 초대 받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스몰웨딩이라 친구의 열명 남짓한 친구들만 초대 받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집에서 먼 곳이라 너무도 가기 싫었지만. 20년 넘은 몇 안되는 친구이기에, 당일까지도 망설이다가 꾸역꾸역 갔다.
스몰웨딩에다가 외국인과 결혼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문화와 미국의 전통 문화들이 녹아든 결혼식이라 매번 가는 결혼식과 느낌이 무척 달랐다. 결혼식을 매우 천천히 보며, 내가 정말 사랑하는 친구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축복하는데 마음이 뭔가 몽글몽글 하면서 펑펑 울었던 것 같다. 피로연에서는 다 서로가 모르는 사이였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과 정말 재밌게 이야기하며 밤늦게까지 놀았다. 새로운 느낌
두번째, 여행. 난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아이들을 낳은 이후에 제대로 된 여행을 가지 못했다. 돈은 늘 모자랐고, 마음편히 아이를 맡길 곳도 없었고, 아이들을 다 데려가자니 내가 원하는 여행을 갈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남편과 둘이서 조촐히 가까운 곳을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했던 20대의 나의 모습들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난 이런 새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
#7
대단한 것은 아닌데, 이런 경험들로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나만의 감각을 깨운다는 것은 뭔가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나의 천성에 관련된 것들 중 나에게 잘 맞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건드리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점점 나은 선택을 하고 싶어진다.
아직도 무섭다. 새로운 것을 하나씩 시도 하는 것이. 심지어 예능 프로 하나, 드라마 하나도 그렇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내가 버티지 못할까봐 무섭다. 지금 현상 유지도 겨우 하고 있는데 이 현상유지가 무너지고 더 주저앉을까봐 이따금씩 공포감이 몰려올 때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이 평안을 깨뜨리고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다시 다지고 싶기도 하다. 조금씩 깨뜨려본다.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