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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다 Nov 18. 2023

매년 수능 날 즈음 드는 마음

참으로 애썼다. 잘 버티고 열심히 살아주어 고맙다.

사진: Unsplash의Paola Chaaya




#1

매년 수능 날 즈음이 되면, 수능을 치른지 2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몸이 반응한다. 이 11월의 갑자기 차가워지는 바람, 날씨, 온도, 습기 이런 것들이 나를 자극한다.


아버지는 내가 수능을 보기 딱 1주일 전에 돌아가셨다. 수능은 매해 11월 16일에 진행되는데, 11월 9일에 돌아가셨다.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집 근처도 아닌, 멀리 출장지 근처에서 외롭게 쓸쓸히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내가 충격을 받을까봐 처음에 아버지가 좀 아프시다 하고 기차를 함께 탔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마련된 빈소.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모의 당부도 있긴 했다. 


"온다야, 네가 굳건해야해. 네 엄마도 너무 여리고 동생도 어리잖니? 절대 울어선 안돼"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못된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울지 않았다. 


이렇게 무연고지에서 안좋게 죽으면, 장례를 1일장만 치른다고 한다. 빈소에는 사람이 별로 오지 않았다. 워낙이 내성적인 성격에 친구도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SNS가 있을 때가 아니라 널리 알리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3일장이 아닌 하루만에 모든 것을 다 진행해야해서 급박하기도 했다.




#2

나는 문득 생각이 났다. 수능 1주일 전이라 그날은 학원에 있는 짐을 빼야 하는 날이었다.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수능 짐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저 짐을 빼와야 할 것 같아요, 서울 좀 다녀올게요"


하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KTX 기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냥 이게 무슨 일이지. 전혀 정황을 알 수 없고 정신도 없었다. 그 와중에 수능 짐을 찾으러 가는 나는 제정신인가.


건너편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하염없이 우는 나를 보더니 귤을 몇개 주셨다. 울지 말라고 안쓰럽게 얘기하며 내리셨다.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수능 짐을 빼야하는데 다시 장례식장에 돌아가야해서 내 짐을 좀 맡겨줄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학원에가서 짐을 뺐다. 그랬던 이유는 수능이 며칠 남지 않아서 학원이 종강되었고, 사물함에 있는 짐들을 며칠 후 폐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데, 그 사물함에는 내가 열심히 공부한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한 번 더 보려고 한 터여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

친구에게 짐을 맡기고 다시 장례식장에 돌아오니 어두운 밤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이모의 말을 듣고 멍하게 빈소를 지켰다. 술에 취한 친척 분이 오셔서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이 나지 않니? 독하네"


욕이 나올뻔 했지만,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다시 올라가 학원에 있는 짐을 빼온 정신나간 아이니까.


아버지 입관식에 참여했다. 장례지도사님이 말씀하셨다.


"만지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울지 마세요. 눈물이 떨어져 묻으면 영혼이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됩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수축되어있었다. 잠시 손을 만졌는데 통나무처럼 딱딱했다. 그리고 굉장히 차가웠다. 힘없이 벌어진 입. 눈물이 나왔는데, 눈물이 떨어지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꾹 참았다.




#4

아버지의 장례를 다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수능 날짜가 4일 남았었다. 도저히 공부할 정신은 아니었지만, 일단 도서관에 가서 책을 폈다.


모의고사를 하나 풀었는데, 엉망으로 성적이 나왔다. 당황스러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풀었던 것인데 기억이 갑자기 잘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수능을 볼 생각을 한 것도 기가막히다며 작은 어머니는 혀를 찼다. 당장 마트에 취직해서 일하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수능에 집착했던 이유는 아버지와 수능을 보면서 굉장히 친해졌기 때문이다. 나의 진로를 정하는 과정,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대해 아버지와 진지하게 얘기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나의 모습을 아버지가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내가 합격하고 싶은 학교의 마크도 인쇄해서 책상과 식탁에 붙여주는 그런 아빠였다.


그래서 꼭 그 학교에 가는 것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꼭 가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놓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1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온 나를 그냥 버릴 수 없었다. 슬퍼하더라도 수능이 끝나고서 슬퍼해야지.


하지만 도서관에 가서 눈물만 줄줄 나오고 당췌 문제가 읽히지 않는 것이었다. 함께 재수했던 친구가 다가와서 도서관이라 메모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친구도 함께 울면서 아버지가 지켜주실 것이고, 너는 끝까지 해낼 수 있을거라고 얘기하며 두세시간정도 울면서 글을 쓰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생각하며 기도하셨는데, 눈물이 줄줄 나왔다고 말해줬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할 때에는 그 사람의 감정에 이입이 되는데 너무도 슬퍼서 눈물이 계속 나왔다고. 그렇지만 끝까지 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열심히 기도를 해주셨다고 한다.




#5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전해서 친구들이 괜찮아? 라고 묻는 순간 나는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수능 짐을 맡긴 친구,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함께 울어 준 그 친구 둘만이 내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다.


그리고서 수능 전날이 다가왔다. 모의고사를 다시 풀어봐도 가을에 무척 올랐던 성적만큼 나오지도 않고, 문제도 잘 읽히지 않았다. 그냥 그 학교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사고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년 동안 노력한 나를 위해, 아버지와의 약속을 위해 수능은 최선을 다해 볼 것이고, 결과가 안좋아도 이러저러한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수능을 봤다. 잠시 동안은 슬픔 감정을 어떻게든 빼놓고 그냥 문제에 몰입하면서 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1분 1초도 정성을 다해 봤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채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며칠 전 모의고사를 푼 나를 보아서는 제대로된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고등학교에서 성적표를 종이 쪽지로 나눠줬는데,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접어서 집에 있는 서랍에 넣어버렸다. 차마 확인 하기가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6

결국 내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무척 가고 싶어했던 학교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에 대해 무척 또 슬프고 극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사실 가끔 그 학교에 대한 이야기나 그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 한켠이 아리기도 하다. 그렇게 간절히 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시험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한 학교만을 생각하며 공부한 터라 아무런 준비도 없었지만 운이 좋게도, 괜찮은 학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학과는 아버지가 공부했던 전공이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아버지의 책과, 자격증을 보고 알게되었다)


그렇게 대학에 합격한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대학에서의 생활의 하루하루를 정말 소중히 여기며 다녔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기운 가세에도, 나에게 있는 것은 내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교통비, 통신비, 식비 겨우 벌어서 힘들게 다녔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 다닐 수 있어서 늘 감사했다.


그냥 날씨 좋은 어느 날에 햇빛을 받으며, 한 쪽에 두꺼운 책을 한 권 들고 강의실로 가는 그 순간이 그렇게나 행복했다. 하루 하루가 소중한 날들이었고, 그 소중한 날들이 쌓여 또 오늘의 내가 되었다.




#7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그때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가 수능 일주일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며 버텼다. 버티고 버티고 악착같이 사회에서 나를 밀어내려 때마다 버텼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고도, 회사에서 10년 넘게 살아남아 버티고 있다.


물론 그 이후에 더 힘든 순간, 동생의 죽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에게서 힘을 받고 싶은 날들이기도 하고, 그떄의 나에게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주어 고맙다고. 


원래 그때의 나는 큰 위안를 받고 싶었다. 20년 뒤의 내가 갑자기 다가와서


 "지금은 다 괜찮아, 이제 밥 못먹을 걱정은 안해도 되고, 계단에서 빵 먹지 않아도 돼. 이건 네가 다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야. 고마워. 그러니 지금 힘든거 괜찮아. 버틸 수 있어 괜찮아."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진짜 가끔씩 했다. 


이제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이 다 괜찮다라고만 말할 수 없다. 꼭 당장의 가난을 극복했다고 해서 행복한 삶은 아니며, 다른 아픔이 또 기다리고 있으며, 인생에서 가장 힘든일이라 생각했던 일보다 더 힘든 일도 겪게 될 것이니까.


하지만 난 그때의 내가 고마운 것은 사실이다. 그떄의 내가 기특한 것도 사실이다. 참 애썼고. 정말 잘해왔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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