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게임, 번아웃과 무기력증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기
#1
요새 블라인드나 각종 SNS의 익명 게시판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지쳐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특히 "요새 너무 번아웃이 되어, 집에 가서 아이를 잘 돌보기가 힘든데, 힘이 나는 유튜브 채널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타입의 글을 많이 봅니다. 안타깝게도,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말이나 영상이 주는 힘은 아주 잠깐 입니다. 그마저도 반복이 되다보면 거기서 거기 뻔한 이야기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말을 듣기도 하죠.
"취미를 가져보세요, 맛있는 것을 좀 먹어봐요. 햇빛을 쬐며 좀 걸어보세요. 운동을 하세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체력과 건강이 건강한 정신을 붙잡아주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니까요. 하지만 아주 바닥을 친 무기력, 번아웃을 겪을 때에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좀 나가서 걸어야겠다'라는 건설적인 생각이 들만큼의 에너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밑에 스텝은 저만의 방법입니다.
Step1 >
일단 무조건 쉰다. 쉰다는 것은 논다는 것과 다르다. 생활에 지장이 없을만큼의 최소한의 것만 한다.
Step2 >
To do list가 아닌 Done list를 쓴다. 물론 이것도 Step1의 기간을 통해 에너지가 어느 정도 차올라야 가능하다. 이것을 쓸 때에는, 정말 아주 사소한 것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했다'라는 정도까지로 내가 평소에 당연하게 했던 것들 단위를 다 나누어 세세하게 다 쓴다.
Step3>
Step2의 시간을 충분히 겪으며, 어느 정도 내가 힘이 차올랐다고 생각하면, 큰 마음을 먹고 해낼 수 있는 일을 하루에 한 가지 정도 시도 해본다.
Step4>
Step2~3을 반복하며,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어느 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하루에 어느 정도가 가능한지를 관찰하며 무리스러울 때 스스로 자각하고 멈출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번아웃으로 병가를 쓴 만큼 에너지가 떨어졌던 제가 위의 과정을 겪으며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점점 나아졌던 2년 간의 경험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2
2년 전, 동생을 잃고 난 이후 저의 삶은 너무나도 허망해졌습니다. 열심히 살면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해내며 성취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을 위해 힘든 시간 20년 넘게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텨왔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젊은 생이 떠나가는 것을 보니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원망이 제 삶을 집어삼켰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회사를 간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도무지 가지 않고 빨리 밤이 되어 자고 싶다는 생각 뿐. 더 이상 삶을 위해 왜 노력을 해야하는지 모르겠으며, 그 어느 것도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함은, 단순히 일에 집중하는 것 뿐만 아니라 평소에 좋아하던 독서나, 심지어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들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나의 모든 활동에는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것 을요. 생각없이 TV나 넷플릭스를 본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것도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주인공에 몰입을 한다든지, 스트레스 상황이 생기는 것이 가상일지라도 감정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것이죠. 극심한 무기력과 번아웃을 겪는 다는 것은 드라마 한 편도 제대로 못 볼만큼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3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회사를 잠시 쉬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길로 사회생활을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상담사에게 병가를 권유 받았을 때 내가 잠시 쉰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담사님의 끈질긴 권유와, 버티고 버티다 정말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할 것 같아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휴직을 하고서 정말 생활에 꼭 필요한 일만 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이들을 등원/등교 시킨 다음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또 앉거나 누워있다가 아이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최소한의 해야할 것들만 한 뒤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몇 주 하다보니, 처음으로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누워있을 때 웹툰을 보게 되었습니다. 웹툰을 보던 어느 날, <모죠의 일지>라는 웹툰에서 작가가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칭하며 말했죠.
"좋아, 난 이제 Done list를 쓰겠어!"
#4
예전이었으면, 에이 이게 뭐야 하고 웃어넘길 일이었는데 자뭇 심각하게 다가왔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 삶은 To do list 삶 그 자체 였습니다. 항상 해야 할 일은 넘쳐났고, 욕심과 계획이 많았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못해서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의 어려운 삶에서 벗어났지만 부작용도 심각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자책감에 항상 시달렸죠. 그래서 그 몇 주 쉬는 시간도 온전히 쉰다기보다는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정말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은 걸까?' 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 속을 둥둥 떠다녔습니다. 약간의 회복을 거쳐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에너지가 차올랐을 때, 저는 매일 Done list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것 까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의 사소한 것들도 해냈다고 Done list에 적어나갔습니다.
처음에 적었던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 아이들 등교 시키기
- 점심 챙겨 먹기
- 세탁 돌리기
- 건조기 돌리기
- 아이 하원 시키기
- 빨래 개기
- 병원 예약날짜 전화해서 변경하기
정말 사소하죠? 맨 위에 날짜를 쓰고 위와 같은 것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매일 적다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제가 쓰는 다이어리는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인데,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20 줄칸이 있는 수첩입니다. 처음의 하루 Done list는 3줄, 5줄 정도 였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늘어나서 7줄이 되고 10 줄이 되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은 늘어났고 나중에는 나의 에너지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에게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 2만큼의 에너지가 든다면, 은행에 가서 뭔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것으 10만큼의 에너지가 들고, 전화를 해서 무언가를 예약하는 것은 3만큼의 에너지가 듭니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마음을 크게 먹어야지 할 수 있는 것'과 '그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좀 더 발전해서 원칙이 생겼습니다.
-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할 수 있는 것은 하루에 최대 1개만 한다
- Done list는 한 쪽을 넘어가지 않는다 (20줄이니 19개가 넘을 수 없습니다)
점점 성취는 쌓여가고, 저를 괴롭히지도 않았으며,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을 크게 먹고 해낸 것에 뿌듯함을 느겼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다시 드라마도 볼 수 있게 되고(하지만 지금도,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드라마, 올림픽 경기와 같이 승패가 있는 긴장감을 주는 컨텐츠는 못 봅니다),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활동하는 에너지도 생겼습니다.
#5
저렇게 한 번에 모든 것을 깨닫고 계속해서 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에너지를 그럭저럭 채우고 회사에 복귀하고서 그 뒤로도 두어 번의 무기력과 번아웃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두어 번 똑같이 반복했고, 똑같이 빠져나왔습니다.
하루를 '에너지 게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에너지의 총량을 알아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더 할 수 있어도 축이 날 것 같으면, 꼭 지금 해야하는 일이 아니라면 멈춥니다. To do list는 안보이는 곳에 따로 적어 놓고, 에너지가 남는 날 하나씩 골라서 합니다.
<다섯 연으로 된 짧은 자서전>이라는 시를 아시나요? 보도 한가운데 깊은 구멍 그것이 번아웃과 무기력증이라면 이제는 알아차리고 빠져나올 수 있는 약간의 방법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회사를 간다는 것. 이거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에너지입니다. 이것만 잘 하고 있다해도 대단하게 잘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일이 아니예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하루에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차리며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멈추고 에너지를 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섯 연으로 된 짧은 자서전 (Autobiography in Five Short Chapters)
- Portia Nelson
1.
난 길을 걷고 있었다.
보도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곳에 빠졌다.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난 길을 걷고 있었다.
보도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걸 못 본 체했다.
난 다시 그곳에 빠졌다.
똑같은 자리에 또다시 빠진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데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3.
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보도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미리 알아차렸지만 또다시 그곳에 빠졌다.
그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난 비로소 눈을 떴다.
난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난 얼른 그곳에서 나왔다.
4.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보도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 둘레로 돌아서 지나갔다.
5.
난 이제 다른 길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