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철없던 10대, 모든 것이 불안했던 20대, 도전의 연속이었던 30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게 될 40대...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할 만큼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젠 어린 나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내 나이 불혹. 그 시간을 걸어오며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이 있다면 무엇일까.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20대의 너에게로 돌아가 딱 한 마디만 전하고 올 수 있게 해 줄게. 자, 말해봐.”
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전할 것 같다.
“아로야, 제발 눈치 좀 그만 봐”
나의 20대는 눈치 딱지 컬렉터(Collector)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눈치 보며 사는 게 일상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학창 시절에 돌아가셨기에 실상 난 고아였는데, 그 고아라는 두 글자가 날 위축되게 만든 첫 번째 눈치 딱지였다.
나는 꽤 명랑한 여대생이었다.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성격이 밝은 것일 뿐, 그렇다고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외모와 패션으로 인해 교수님이나 선배들에게 이유 없이 찍히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은 선배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려 가 혼이 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선배가 나에게 “부모 없는 애”라는 표현을 했다.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반항할 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게 그 소문은 학과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었다. 겨우 스무 살. 나에게 그 소문은 상처였고 고통이었다. 누가 알고, 누가 모르는지 알 수도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입학 때까지만 해도 발랄했던 나는 그날 이후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강박은 친구들 사이에서까지 나타나게 됐고, 행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마음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먼저 시원하게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를 보는 좋지 않은 시선이 두려웠다.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양보와 배려를 무기처럼 꺼내어 쓰며, 그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생긴 시발점이 바로 그때였다.
대학 졸업 후, 서울 강남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함께 일하는 동료, 선후배 대부분은 서울권 4년제 대학 출신이었고, 나는 지방 전문대 출신이었다. 더러는 명문대 졸업생도 있었는데 믿기 어렵게도, 내가 그중 일머리가 가장 좋았다.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순간마다 항상 내 의견이 최종선택 되었고, 하필 전문대 주제에 쓸데없이 아이디어가 뛰어난 나는 또 하나의 눈치 딱지를 얻어야 했다.
내가 노력해서 받은 칭찬인데도 불구하고 그 칭찬이 어느 순간부터는 불편하게 여겨졌고, 그런 상황이 싫어 회사에서 서서히 입을 닫게 되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회사생활을 이어오던 어느 날은 차라리 이곳을 떠나는 편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퇴근길에 무작정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입사한 지 딱 3개월 만이었다.
그 후, 난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며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을 떠난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당시 결혼을 너무 원하던 남자친구의 속전속결 추진력이 발동하는 바람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하게 됐고, 그 계기가 그간 쌓아 올린 서울 생활의 막을 내리게 했다.
스물여섯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이민이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식만 간단히 올린 후 캐나다로 함께 유학 가기로 되어있었다. 어차피 한국에서 살 것이 아니었기에 집과 혼수를 따로 장만할 필요가 없어 잠시 지낼 단기임대 오피스텔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하지만 비자 문제와 함께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면서 이민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살 곳이 없어진 우리 부부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대전에 있는 시댁으로 내려와 얹혀살게 됐다.
시부모님과 벽 한 칸을 두고 신혼생활을 해야 했던 나는 일어나는 것, 밥 먹는 것, 씻는 것, 잠자는 것까지 어느 하나 마음 편한 게 없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머리가 길어 다듬으러 가는 것도, 심지어 동네 편의점에 가는 것까지 모두 허락받았다.
2년의 합가 기간 안에 자연스레 아이가 생겼는데, 친구나 친정 식구들이 아기를 보러 오는 날이면 행여나 어머님 아버님께서 불편해하실까 노심초사 눈치만 살피느라 그간의 근황 토크는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렇게 나의 20대 후반에는 시댁살이 딱지가 붙었다.
눈치 딱지 모으기 대잔치를 벌이던 내 20대의 삶. 그렇게 살아온 내가 눈치 보지 않고 무언가를 결정하기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가 딱히 뭐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혼자 괜히 주눅 들어 눈치 본 일들도 많았다. 시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부모님이라고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편하셨을까. 나의 그 모든 행동은 불편함을 핑계로 어쩌면 내 마음 편한 길을 찾아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눈치 보느라 한 그 모든 선택이 그때는 최선의 결정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