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얼굴로 기억하고 연대하는 공간
2024년 12월 마지막 주, 우리는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세 식구가 함께 제주 여행을 떠났다. 겨울의 제주는 푸른 바다보다 오름과 숲이 더 어울린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중산간 풍경이 겨울 제주의 매력이다. 게다가 꼭 머물고 싶었던 숙소가 있었다. 바로 ‘삼달다방’.
삼달다방은 우리가 좋아하는 김영갑 갤러리와도 가까웠고, 예전에 인연을 맺은 활동가분들이 추천해 준 곳이기도 하고 작년 지리산포럼에서 삼달다방 주인 부부와 제주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하여 궁금해하던 곳이었다. SNS로 본 삼달다방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따뜻했다.
사실 삼달다방은 일반적인 ‘다방’이라기보다는, 다방의 역할을 하는 공용 공간과 게스트하우스가 함께 있는 복합 공간이다. 주인 부부는 장애인운동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신 분들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많은 시민사회 인권 활동가들이 머물곤 한다. 대안학교나 시민단체의 워크숍 장소로도 쓰이고, 장애인 당사자들이 제주 여행을 할 때 머무는 숙소로도 활용된다. 이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리어프리가 아닌 곳이 없다.
우리가 묵은 ‘무지개동’은 다양한 방문객들을 위한 객실이었다. 별채로 마련된 ‘문화동’은 주방과 카페 시설이 갖춰진 공용 공간으로, 다방이자 강당 같은 곳이었다. 아침과 저녁엔 함께 식사를 하고, 북토크나 문화공연, 워크숍이 열리기도 하며, 밤이면 술 한잔 기울이는 공간으로, 낮엔 작업공간이자 만화방으로, 아이들의 놀이 공간인 다락방까지 갖춘 다채로운 곳이다.
첫째 날
오후 늦게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삼달다방에 연락을 했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셨다. 짐을 푼 후, 무지개색 외벽이 인상적인 무지개동 방에 짐을 풀고 문화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숙박객들이 식판에 반찬을 덜어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눈인사만 하고 어색하게 구석에 앉아 밥을 먹었다. 말 거는 이는 없었지만, 묵고 있던 한 아이가 이현이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강아지 좋아해? 쟤 이름은 한라야.”
식사 후 샤워를 마치고 다시 문화동에 가보니, 이현이는 다락방에서 새로운 친구와 놀고 있었고, 다른 숙박객들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한쪽에 앉아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과 오브제들을 둘러보며 공간을 살폈다. 따뜻하지만 낯선 분위기였다.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알고 지내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어디서 오셨어요?”
이 질문은 단순히 사는 곳을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삼달다방을 알게 됐나요?’, ‘어느 단체에서 일하시나요?’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듯했다. 이곳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일종의 커뮤니티 같은 공간같았다. 우리는 얼떨결에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아, 저희는 그냥 일반 시민이에요 “
그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앗, 어디선가 눈에 많이 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구시더라…
“저 발바닥행동에서 일했어요. 기억 안 나세요? “
”어머, 효정님!!! “
10여년 만의 만남이었다. 20대 후반, 각 조직의 담당자로 함께 협업을 했던 우리는 어느덧 40대가 되어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주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꼭 안았다. 시민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은 나에게 장애인 인권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가지게 해 준 곳이었다. 그곳과의 협업 덕분에 나는 ‘장애인 탈시설 운동’을 처음 접했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구체적인 지향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 스토리를 온라인에 연재하고, 기부 플랫폼을 연계하여 모금을 진행 했었다.
둘째 날
다음날 아침, “식사하러 오세요”라는 문자를 받고 문화동으로 갔다. 귤잼과 빵이 놓인 식탁, 삼달다방 주인분이 직접 내려준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근데, 삼달다방은 조식과 석식이 포함인가요? “
”그건 아니고, 우리가 먹는 김에 함께 나눠 먹자는 거예요. “
조금 추운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걸어서 김영갑 갤러리에 갔다. 오래된 분교를 정성스레 꾸며 사진을 전시한 김영갑 작가의 공간은 그의 마지막 숨결이 남아 있었다. 오름 사진들 사이를 거닐다, 5년 전 아기였던 이현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자리에서 다시 같은 구도로 사진을 남겼다.
그날 오후, 삼달다방을 추천해 준 지인이 보내준 맛집 리스트 중 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귤밭 옆 카페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 추운 바람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걷고 있는데, 한 차량이 우리 앞에 섰다.
“추워요. 타세요.”
삼달다방 주인분이었다.
저녁엔 사람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 저녁을 먹으며 삼달다방에 있는 사람들을 챙겨볼 수 있었다. 부부인 삼달다방 지기분들, 효정님의 가족들, 효정님과 함께 일하는 활동가분들과 가족분들, 혼자 여행 온 여성 장애인분. 식사 후, 다들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주 한잔 같이 할래요?”
효정님이 있어서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활동가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면대면으로 누군가의 활동 주제와 스토리에 대해 듣는 것은 그 사회문제와 내 삶이 연결되는 쉬운 방법이다. 어디 책에 쓰인 게 아니라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내 눈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말의 힘과 온도가 오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활동가 두 분이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 분들은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을 시설에서 보냈다고 했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스치며, 대화하며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에 사실 놀랐다. 효정님의 활동가 동료분들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고, 삶의 긴 시간을 장애인시설에서 보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장애인 탈시설’ ‘장애인 자립생활’이라는 키워드가 나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음에도 당사자의 얼굴로 어떠한 주제를 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다른 차원이었다.
그 분들은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 가족과 떨어지게 되었고, 장애인 시설에서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을 엄마, 이모라 부르며 자라왔다고. 중증 장애는 아니었기에 시설의 중증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기고 하였고, 예체능 등을 배워 선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고. 성인이 되었고, 시설을 자신의 발로 나왔고, 이제는 시설에 있는 친구들이 탈시설을 선택하고 지역 안에서 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시설에 함께 했던 선생님들이 자신들에게 '배신'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혼자 나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을 하고, 여행도 하고, 친구도 만들며 살아가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가 삭제된 채로 제도와 정책이 만들어졌다면, 이젠 자신들이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담담하게, 오히려 명랑하게 자신의 이야기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필요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셋째 날
이젠 익숙해진 얼굴들. 아침 식사 자리에서는 다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서귀포 치유의 숲 예약이 되어 있어 차를 타고 이동했다. 이동 중에 속보를 접했다. 무안공항에서 비행기 사고가 났고, 구조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숲을 걸으며 이현이와 함께 기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숲을 나와 속보를 확인한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 뉴스를 껐다. 삼달다방에 TV가 없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날은 삼달다방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회를 사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아이들 덕분에 웃음도 있었다. 식사 후 아이들은 영화에 집중했고, 어른들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항공기 사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대통령 탄핵, 농민회의 밤샘 투쟁,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함께한 여대생들,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와 변화에 대한 이야기.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공감대와 강한 연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국에 대한 이야기 보다 더 강력한 스토리가 있었다.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인 활동가 두 분의 이야기였다. 그 분들은 내가 마지막 밤이라고 하니 꼭 보여주고 싶은 영상이 있다며 빔프로젝트를 켰다.
첫 번째 영상은 활동가분이 전국 장애인 부모연대 집회에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 앞에서 한 발언 영상이었다. 자신은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 발달장애로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자랐고, 탈시설 후 20년 만에 친엄마를 찾으려고 했었지만, 엄마는 결국 보기를 원치 않았다고 했다.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나를 세상에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말아 주세요. 저는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엄마 인생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중략) 부모님들 지치시죠. 저희를 키우느라 고생하셨죠. 조금만 더 힘내세요.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표현을 못할 뿐입니다. 힘들다고 같이 죽으려 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 말고,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부모가 아닌, 국가가 아닌, 우리 사회에 제도가 발전해서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의 동료로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영상은 또 다른 활동가분이 2024년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 참고인으로 참석하여 국회의원과 정부부처 앞에서 한 발언 영상이었다. 국회의원의 질의와 정부기관에서의 답변을 마무리하고, 위원장이 마무리를 하려고 할 때 그녀가 마이크를 켰다.
“위원장님, 저 하고 싶은 말 마저 전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시설에서는 저라는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를 20년 동안 시설에서 살게 한 사회한테 사과받고 싶습니다. 지금 시설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11시부터 와서 8시간 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발달장애인이 의사가 없다고 무시당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듣지 않았던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효정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장애인 탈시설 운동을 계속해줘서, 계속 있어줘서, 이렇게 두 사람이 당사자로서의 존재 자체로 목소리를 내고 살아갈 수 있게 옆에 있어줘서 참 고마웠다.
넷째 날
아침에 함께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겼다. 삼달에서의 시간은 조용하고 느리고, 차분히 흘렀다. 누구도 우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잔잔히 돌봄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챙겨서 나오니 모든 사람들이 붙어서 귤을 까고 있었다. 남은 귤들을 말려서 간식으로 만든다고 했다. 한 손에 다들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3초에 1개의 귤을 깠다. 노하우를 배웠다.
아이들은 서로 인사했다. 서울 가서 또 보자는 이야기를 하며 아쉽게 인사를 하였다. 함께 했던 활동가분들과, 삼달다방 지기분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삼달다방이라는 이 공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었다.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이었다. 나에겐 제주지역에서 인사 나눌 사람이 있는, 찾아가 하룻밤 보내거나 혹은 커피 한 잔을 함께할 공간이 생겼다.
다음 숙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검색했다.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당사자들이 생활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를 통해 활동지원사와 함께 한다고 했다. 활동지원사와 잘 맞고, 관계가 지속되면 친구처럼 지내기도 한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회복지사 자격이 있는 덕분에 일주일간의 교육을 듣고, 실습을 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을 하는 때가 되면, 나의 역할 중 하나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올해 회사 일이 여유로울 시기가 언제더라… 상반기 바쁜 업무들이 마무리되면 일주일 휴가를 내고 도전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