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깊어지는 주부의 시간

by 토쁜파크

몇 년 만에 네 가족이 보드게임을 했다.


중3 첫째가

"우리 BANG 할까?' 라며 게임을 원했다.


오랜만이라 규칙은 가물거렸지만

게임 도중의 긴장감과 승부욕,

게임 후의 풍성한 이야깃거리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우리 마음에는 어려서부터 만들어진 수많은 방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그 방문이 두드려져 열리면

기억 속 감성은 시간을 잊은 듯 생생하게 전달된다.


딸이 먼저 'BANG'을 제안한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하며 만들어진

마음속 보드게임 방이 열렸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하천길을 따라 걷는다.

물 위에서 먹이를 찾는 청둥오리, 백로, 왜가리를 마주치며 걷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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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 중간에 유속이 느껴지지 않고 색이 탁한 구간에 닿는다.


전업주부 16년 차인 나는 느린 구간이 내 모습처럼 보이곤 했다.

사회로부터 도태되고 정체된 것 아닐까 하는 고립감이 있어서

마치 흐름을 잃고 고여 있는 물처럼 나를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천의 안내판 문구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생태적으로 건강한 곳입니다.'


사춘기 아이가 원했던 보드게임을 하면서

이 느린 지점이야말로 각자의 마음 방에

기억과 웃음을 저장해 놓는 시간들이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시간만 놓고 보면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족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적으로 건강한 구간'이었다.


소소한 일상에서 좋았던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사춘기 소녀와도 웃으며 'BANG!'을 외칠 수 있다고,


흐름이 느리다고 멈춘 것이 아니라

깊이를 더하며 느리게 차오르고 있다고,


나의 시간을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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