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번 써봅시다>를 읽고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작가라는 거룩한 영예를, 다른 녀석이 제 값을 치르지 않고 길에서 주웠다고 여기서 부린 트집 잡기였다. 정의감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다. 그 흉한 감정은 내 책이 나온 뒤에야 겨우 사라졌다.
p.54, <책 한번 써봅시다> by 장강명
이 대목을 읽는데, 그 질투심이 살아난다. 트집 잡는 마음이 되살아난다. 불현듯 나를 데려간 곳은 기숙사 체육대회이다. 대학교 3학년 때, 기숙사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다. 체육대회의 마지막은 늘 계주이고, 언제나처럼 가슴이 뛰었다. 학교 다닐 때 매번 계주 선수로 달렸는데, 대학생이 되어 처음 접한 계주에서는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 용기를 더욱 작아지게 한 것은 기숙사에 있는 몇몇 체대생이었다. 남녀 각각 4명을 뽑는데, 마지막까지 심장만 쿵쾅쿵쾅 뛰다 결국 자원하지 못한 채, 계주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팀이 졌고, 괜히 트집 잡는 마음이 생기면서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뛸걸… 체대생인데 달리기는 못하나 보네.’
이때의 흉한 감정은 그 후로 계주에 ‘제가 뛸게요.’라고 자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입사 첫해, 회사 체육대회 준비를 하는데 계주 선수를 뽑는다고 신청하란다. 유독 운동 잘하는 선배를 알기에 마음이 쓰였지만, 기숙사 체육대회의 경험을 떠올리며 작아지는 용기를 붙잡아 지원했고 심지어 여자 마지막, 네 번째 주자를 하겠다고 했다. (아! 다시 생각해도 떨려^^). 여, 남 순서로 각 팀에서 총 8명이 뛰기에, 내가 뛰고 마지막 남자 주자에게 배턴을 넘기면 된다. 경기가 시작되고 엎치락뒤치락 순서가 바뀐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끼면서 가볍게 모둠 뛰기를 하며 순서를 기다리는데, 우리 팀이 세 번째로 내게 다가왔다. 배턴을 넘겨받고 힘껏 뛰었다. 뛰는 순간은 긴장되지 않아 좋고, 그렇게 한 명, 또 다른 한 명까지 제쳐서 1위로 가는 순간은 정말 짜릿하다. 난 그렇게 역전 스타가 되어 마지막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줬고, 우리 팀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 뒤로 아이의 유치원 체육대회에서도 계주를 해서, 첫 번째로 배턴을 넘겨주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체육 전공생 존재에 주눅 들어 포기했던 대학시절 마음은, 그 뒤 계주에 빠지지 않고 지원하는 용기가 되었다. 다들 소리 높여 응원하고, 졌음을 아쉬워하던 분위기와 다르게, 나는 달리기 트랙이 아닌 응원석에 있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그런데 왜 유독 책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그거 써서 뭐 하려고?”하고 스스로 묻고 “내가 그런다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며 자기검열에 빠지는 걸까. 그냥 내가 좋아서 쓴다는 이유로는 부족한 걸까. 책 쓰기의 목적이 나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p.48, <책 한번 써 봅시다> by 장강명
“나 같은 게 무슨 책….”이라고요? 이 말에 이제는 나의 달리기 경험을 붙인다. ‘문예창작, 국문과 뿐만 아니라, 글 잘 쓰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내가 어떻게 글을 쓰며 계속 뛸 수 있겠어’라고 포기하면, 두고두고 응원석에 앉아서 그런 질투심을 느끼고 있겠지 싶다. 운동선수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뛰는 것이 신나서 참여했던 계주처럼, 마음속에 떠 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좋기에, 글 쓰는 트랙에서 꾸준히 뛰고 있을 내 모습이 좋아서 써가고 싶다.
사실 나는 책과 친하지도 않았다. 3년 전 시작한 영어원서 북클럽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조금씩 알아갔다. 내가 책을 싫어했던 이유를. 나는 교과서의 시를 읽고 다르게 느끼는데, 시험에서 요구하는 글쓴이의 생각을 외워야 하고, 그 답과 다른 내 생각과 느낌은 틀린 것이 되어서 싫었던 모양이다. 북클럽에서 자유로운 책 읽기를 하며, 내가 멈추고 싶은 대목에서 나의 감정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적어보면서 다시 책이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단상이 좋다고 말해 주시는 분들, 또 나의 인사이트가 좋다며 같이 책 읽자고 연락 주시는 분, 몇몇 뜻하지 않은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생각하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한창 SNS에 육아 모습을 올릴 때도, 짧은 글이고 기록을 위해 남기는 글이지만 여러 번 읽고 고치던 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학창 시절 파일에서 글 잘 쓴다고 칭찬하는 편지를 재발견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할 용기를 충전했다. ‘내가 무슨 글이야’며 움츠려 들더라도, 글을 쓸수록 안 되서 더 좌절될지라도, 이제는 꺼내 볼 경험이 쌓였다. 무엇보다 책을 읽다가, 일상을 보내다가, 내 감정이 멈추는 곳에서 쉴 수 있고, 그곳을 더 깊이 비춰 보고, 그렇게 발견한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이 그저 좋다.
‘말씀 O, 불빛 O’. 내 이름처럼, 나의 말과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되어 그곳을 비춰 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로 순간순간을 비추는 사람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