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비가 많이 쏟아져서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긴장하며 운전 중이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 근처 백화점 식품관에 들렀더니 민트잎이 있다며, 어떤 종류로 사 갈까 묻는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가장 친숙한 애플민트로 하자고 전화를 끊었는데 민트잎 사는 남편 모습에 웃음이 났고, 빗 속 긴장감이 살짝 풀렸다.
엄지 작가 '음식과 고전' 프로젝트에서 진행한 8월 고전작품은 <위대한 개츠비>. 소설 속 '민트 줄렙'을 마시며, 땀으로 끈적거리는 8월의 열기를 엄지작가들과 조금이나마 식혀 보고 싶었는데, '민트 줄렙'의 주 재료인 버번위스키가 집에 없었다. 위스키에 관심 많은 남편이 모아 둔 위스키가 꽤 됐기에 당연히 버번위스키도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가 사라져 아쉬움이 컸다.
<위대한 개츠비>는 작가 피츠제럴드가 미국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를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 대신 미국 고유의 '재즈 시대(Jazz Age)'가 열리고, 경제적 호황 속 자동차, 전기 보급을 누리는 미국 상류층 모습이 '금주법'이 시행되던 상황과 어울려 이 소설에서 세세하게 표현되었기에, 유럽에서 들여온 보리가 아닌 미국의 옥수수로 만든 버번위스키가 '민트 줄렙'의 재료로 꼭 필요했다.
아쉽게도 엄지작가 요리 프로젝트에서 '민트 줄렙'은 못 마셨지만, 1주일 뒤 집에서라도 마셔 보면 그것이 기억과 기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남편의 제안에 함께 마트에서 버번위스키를 샀다. 다만, 민트잎을 구하지 못해 '민트 줄렙'이 보류 중이었는데, 남편이 점심시간에 백화점에서 민트잎을 찾았다.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며 저녁 준비와 동시에 '민트 줄렙' 레시피대로 도구와 재료를 세팅했다. 남편이 도착하여 건네준 민트잎을 받아 씻는데, 애플민트가 주는 향이 어찌나 은은하게 퍼지던지, 민트잎 산다던 남편과 통화할 때의 웃음이 다시 한번 내 얼굴에 번졌고 주방 창으로 보이는 비 개인 뒤의 저녁노을이 더 설레고 상큼했다. 술을 안 마시던 여주인공 데이지가 남편이 있는 집으로 개츠비를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먹은 날, 뉴욕의 호텔로 이동하여 찾았던 '민트 줄렙'은 어떤 매력일지 기대 되는 순간이었다.
설탕이 줄 달콤함 속 위스키의 맛은 어떨지 기대했던 내게, 처음 '민트 줄렙' 한 모금은 달콤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강한 맛이었다. 한 모금 쭉 들이마신 순간 인상을 썼고, 다시 힘차게 젓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이 녹아가고, 바닥의 설탕 맛도 올라오면서 점점 위스키의 쓴 맛은 연해지고 달콤함이 입안에 전해지니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1922년 6월 뉴욕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 룸에는 결혼 직후부터 바람을 피워 온 톰, 그걸 알면서도 안정과 돈을 위해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오던 데이지, 5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 잊지 못한 채 5년 동안 고군분투 하여 가난했던 청년에서 신흥 부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개츠비, 그리고 그들의 구경꾼인 닉과 베이커가 함께 있었다.
신흥 부자가 되어 돌아온 개츠비의 재력과 진실된 사랑을 느끼며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다시 마음이 움직였고, 남편 보란 듯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개츠비에게 사랑의 찬사를 쏟아냈다. 이 답답한 분위기를 참지 못한 톰은 시내로 나가자고 제안했고, 더위도 식히고 '민트 줄렙'을 한 잔 할 장소를 데이지가 원했다. 그렇게 호텔의 스위트 룸에 가게 된 후, 개츠비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데이지가 남편 앞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주기 바랐다. 그리고 그녀의 고향인 루이빌로 돌아가 둘이 결혼식을 올리고 5년 전으로 돌아간 듯 새롭게 시작하길 원했다.
'민트 줄렙'은 '켄터키 더비(Kentucky Derby; 매년 5월 열리는 미국의 3대 경마 경기)'에서 판매되는 공식 칵테일이다. 그리고 그 켄터키 더비는 데이지의 고향인 루이빌에서 열린다. 술을 마시지 않는 데이지가 호텔방에서 요청한 '민트 줄렙'은 그런 개츠비의 마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개츠비가 밀주업으로 돈을 벌었고 그런 돈은 전통부자인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톰의 공격이 시작되자, 개츠비의 표정이 굳으며 공황 상태가 묻어났고, 데이지는 두 남자 사이에서 숨 막힐 듯 당황했다. 어쩔 줄 모르던 그녀는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차로, 톰의 정부인 머틀을 치어 죽게 만드는 사고를 냈다. 이를 알게 된 톰은 집에 돌아와 데이지와 음모를 꾸미는 듯한 대화를 나눈 후, 다음 날 여행을 떠났다.
데이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개츠비를 버리고, 다시 남편 톰을 선택했다. '계급'이 돈의 많고 적음에 따른 객관적인 부라면, 톰과 개츠비는 둘 다 돈 많은 부자, 높은 계급의 사람이다. 하지만 주관적인 시선, 사람들의 인정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는 집안 대대로 부자라고 인정받는 올드머니 톰과 돈을 벌게 된 배경을 두고 여러 설이 난무한 뉴머니 개츠비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녀는 결국 주변의 시선에 있어서도 더 안정적인 지위를 위하여, 끔찍한 사고 후에도 톰을 선택했다.
올해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다. 15년 경력의 주부가 5년이 안 된 데이지의 결혼생활을 쓰다 보니, 나의 5년 차 결혼생활에서 쉽지 않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첫째가 서너살즘 되었던 때, 내 생활은 없는 듯 정신없이 육아를 하다가 남편과 부부 싸움 후, 너무 속 답답하고 집이 싫어서 아이를 데리고 친정 가서 하루 자고 왔던 일이 생각났다. 소위 집 나간 와이프가 되었고, 친정에 이런 일에 대해서 말 안 하는 딸이었는데 그날은 너무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딱 한번 그런 일로 친정에서 자고 왔던 때가, 결혼 5년즘 이었다. 지금은 무슨 일로 싸웠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다행히 아이는 왜 할머니 집에 갔는지 모른 채 마냥 좋아했지만, 그런 시절을 거쳐 지금의 결혼 15년까지 와 있음을 새삼 느낀다.
'민트 줄렙'의 첫맛이 내겐 강한 쓴맛이었던 것처럼, 초기 결혼 생활은 육아와 함께 상상치 못한 여러 쓴 일들이 뒤섞였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식의 출산 후 서로가 다른 입장으로 부딪혔는데, 이제는 그 쓴 경험들이 잘 녹아 맛이 더 잘 섞일 수 있도록 큰 얼음도 미리 갈아서 (crushed ice 준비) 준비하고, 설탕도 조금 더할 줄 알고, 무엇보다 쓴 맛은 덜 넣도록 성장한다. 순간순간의 달콤함이 민트향처럼 기분 좋게 올라오도록 말이다. 위스키, 얼음, 설탕, 민트가 섞여 있는 투명 컵은 우리 부부가 선택하여 만든 가정이라는 울타리 같아서, 이제는 위스키의 강한 맛만 내세우기보다는 단맛을 더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서로 챙길 수 있는 경험이 쌓였다. '민트 줄렙'을 만들어 보라는 남편의 제안이 나를 위한 것인지, 위스키 좋아하는 남편을 위한 것이었던지 간에, 그래도 민트잎을 사러 백화점에 들른 작은 달콤 포인트들이 쌓여가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톰과 데이지의 5년이 안 되는 결혼 생활을 보여주고 마무리된다. 그들은 10년, 15년, 은혼식, 금혼식에는 어떻게 지낼까? 그리고 나는 남편과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금전적으로 개츠비나 톰 같은 계급의 부자는 될 수 없더라도, 서로의 '지위'는 지켜주고 싶다. 내가 바라보는 '남편의 지위', 남편이 바라보는 '아내의 지위'. 적어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서로의 지위'가 보호되는 보금자리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
'민트 줄렙'이 버번위스키의 강한 맛과 민트와 설탕의 은은한 향과 달콤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오래 두고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인 것처럼, 오래 두고 보아도 서로 좋은 그런 부부일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