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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맘 Jan 03. 2024

아기가 자랄수록 외로워지고 있다

생후 15개월: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였으면 좋겠다

15개월의 아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뽐낸다. 아직 말은 많이 트이지 않았지만 웬만한 말은 눈치로 다 알아듣는다. 할머니에게 과일을 먹여드리라든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으라든지 하는 부탁을 어렵지 않게 들어주고 새로운 부탁도 상황을 눈치로 살피며 얼추 비슷하게 해낸다. 하루하루 개인기가 늘어난다. 아기의 손을 잡고 반 걸음 앞에서 이끌어 주어야 하는 엄마도 그만큼 숨 가쁘게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내가 무언가 말을 할 때면 아기는 내 눈과 입을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인지 알아내려고 힘껏 집중한다. 의문형으로 말꼬리가 올라간다 싶으면 "응!"하고 제법 대답을 하기도 하고, "씻자"처럼 본인이 싫어하는 단어가 들리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대화라고 칭하는 그것이 지금 아기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아기가 알아듣지 못할게 뻔한 내 일상까지도 괜히 종알거리게 된다. 아기는 세상 제일의 경청자가 되어 그것마저 집중해 들어준다.


육아휴직한 내게 사람들은 종종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냐고 물어 왔다. 그때마다 나는 아기랑 같이 있는데 뭐가 외롭냐고, 아기랑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나간다고 밝게 대답한다. 휴직한 지 1년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제 아기가 제법 말동무도 해주고 온갖 재롱을 떨어주니 외로움은 덜어져야 마땅할 텐데, 왠지 모르게 나는 요즘 더 외롭다고 느낀다. 아기가 알아듣는 말이 늘어날수록 역설적이게도 그 경이로움과 기쁨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그냥 흔히 들려오는 육아 우울증이 뒤늦게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아가에게 독립된 자아가 생긴다는 시기가 찾아왔다. 내 말을 들어주는 만큼 아가도 본인이 원하는 것이 명확해졌다. 아가는 본인이 이해하고 느끼는 것에 비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턱없이 적어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세상을 향해 떼를 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안해, 아가의 마음을 엄마가 잘 모르겠어"라고 달래는데 그걸로 달래질 리가 없다. 매번 아가의 떼와 울음을 그치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밑천이 드러난 것 같다. 장난감, 인형, 그리고 그날의 일과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기 등으로 하루하루 버티다 며칠 전에는 결국 최후의 보루였던 영상을 보여주고 말았다. 11시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아가의 울음을 견디기 힘들어 아기를 침대 위에 세차게 내려놓는 나 자신을 보면서 두려웠다. 지친 내 마음이 자칫 아기에게 해를 가할까 봐 무서웠다. 문득 그런 내가 낯설어서 훌쩍이면 아가는 내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눈물을 만지작거린다. 난 이 무해한 아기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는 걸까. 방금 전 내가 내지른 호통에도 뒤끝 없이 맑은 아기를 보며 울음이 더 차오른다. 요새는 이런 날의 반복이다.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어서 누구 못지않게 바쁘게 살아왔다. 수많은 지식과 능력을 배양하려고 매 순간 나를 갈고닦아온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육아에 돌입하자 그동안의 노력은 모두 소용없어지고 나는 새로운 출발점에서 다시 경주를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행복해지려고 가진 아기인데 어째 그 경주는 나만 혼자 달리고 있는 것 같다. 억울한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탓할 곳은 나 자신과 남편뿐이라 죄 없는 남편에게만 화살이 자꾸만 날아간다. 심지어 아기의 이쁜 짓 마저 무심하게 지나치게 되는 순간이 쌓여간다. 나를 혼자 두지 말아줬으면 싶은데 바쁜 남편은 나를 돌아봐줄 여유가 없어 보인다. 외로움이 나를 집어삼키다 결국 아기마저 삼켜버릴까 두려워 일단 당장 내일부터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다.


15개월의 아가는 여태껏 키워온 시절 중 가장 이쁘다. 당시에는 예쁘다고 찍어놓은 신생아 시절의 사진들을 보면 코웃음이 날 정도로 지금의 모습이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렇게 반짝이는 아가의 뒤로 힘없이 말라가는 내 모습이 비치어질 때마다 꼭 과거의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저린다. 엄마가 나를 위해 희생하신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제발 그러지 마셨으면 싶었다. 엄마를 갉아먹으면서 자라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했던 엄마의 희생을 지금 내가 막 반복하려고 하는 참이다. 우리 아가는 나와 달리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부채감 없이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엄마의 역할에서 한 발 물러서서 나 자신을 챙겨보기로 했다. 내일 병원 문을 여는 그 발걸음이 우리 모녀의 앞길을 한층 더 밝혀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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