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넘게 외국 회사를 다니면서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다. 주로 본사가 있는 산호세, 샌프란시스코를 많이 다녔는데 산호세는 스무 번 이후론 횟수를 세지 않을 정도로 가 봤고 라스베이거스와 LA는 서너 번 가봤다.
산호세는 내게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첫 출장 때 모든 것이 서툴러 길을 잃고 헤맸던 기억, 영어가 도무지 들리지 않아서 자료를 달달 외우며 밤을 새우던 기억, 영어 강의 테스트 때문에 몇 주 동안 호텔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면서 공부만 했던 기억, 아이가 보고 싶고 집이 그리워서 호텔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 등 추억이 깃든 도시이다, 내일 떠난다 해도 며칠씩 신세 질 수 있는 친구들이 살고 있으니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와 다르게 LA는 항상 관광객 같은 기분이 드는 도시였다.
처음 LA에 갔을 때 이곳이 싫었다. 산호세와는 달리 좁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지저분한 첫인상이 나를 찌푸리게 헸다. 도착하자마자 얼른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는데 이 도시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바로 라밀(Lamill) 커피였다.
출장 첫날 아침, 콘퍼런스 센터로 출근하면서 아무 기대 없이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커피를 받아서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편없을 거라 생각했던 커피가 예상외로 너무 맛있었던 것이다. 커피 애호가라서 출장을 가면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커피를 맛보려고 하는데 LA 출장 때는 일주일 내내 라밀 커피만 마셨다.
사실 미국 출장을 가면 맛있는 커피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미국 라테는 우유 맛이 달라서 그런지 느끼하면서 밍숭 밍숭 하고 아메리카노는 진하고 쓰다. 그날도 전혀 아무런 기대 없이 피곤을 달래 줄 커피를 주문했는데 커피가 너무 맛있었던 것이다. 라밀 커피에 완전히 반해서 돌아올 때 원두도 몇 봉지 사 들고 왔다.
2015년 이후 한동안 LA 출장을 갈 일이 없어서 라밀 커피를 그리워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에서 라밀 커피를 발견하고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신세계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딘앤델루카에서 판매하는 커피가 라밀 커피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LA가 생각날 때마다 딘앤델루카에 들리곤 했다.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동안 가지 못해서 아직도 라밀 커피를 팔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변치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LA 출장은 항상 10월에 갔다. 핼러윈 장식과 어우러진 LA의 단풍은 한국의 단풍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10월의 단풍을 보면 LA와 라밀 커피가 생각난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10월도 지나가 버렸는데 오랜만에 딘앤델루카에 가서 라밀 커피를 마시며 LA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봐야겠다.
오랜만에 신세계 백화점에 가보았더니 라밀 커피가 없어졌다. 이젠 LA에 가야만 라밀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