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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by 아르페지오

퇴사를 준비하는 때에 첫 직장 입사 동기의 승진 소식을 들었다.

그녀와 나는 신입사원 연수 때 같은 조가 되어서 친해지게 되었고 취향도 성격도 잘 맞아서 첫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연락하며 지냈다. 최근 몇 년 전까지도 일 년에 한두 번씩 얼굴을 보곤 했는데 작년에 팀장으로 진급한 후에는 너무 바빠져서 만날 수가 없었다. 뉴스에서 가끔 그녀 사진과 소식을 볼 수 있어서 잘 지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했는데 며칠 전에 그녀가 임원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통화라도 해서 진심 어린 축하를 전했을 텐데 퇴사를 해서 그런지 선뜻 통화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시작점이 같았던 그녀는 저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은퇴를 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나를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나의 첫 직장은 매우 안정적인 대기업이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 공기업에서 사기업으로 전환을 앞두고 있었는데 근무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인지라 공기업의 분위기를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공기업 시절에 하던 동절기 단축 근무 제도 같은 것들이 그대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곳에 3년 근무하다가 부서 전체가 대전으로 이전하게 되어서 이직을 하였다. 그런데 퇴사한 지 몇 달 지난 후에 알아보니 순진한 나만 급하게 이직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서울 연구소에 남아있었다. 일신 상의 이유로 대전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신청을 한 후 서울 연구소에 자리가 생길 때까지 대기 발령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다들 워킹맘이었고 남편과 아이를 두고 대전으로 갈 수 없어서 퇴사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서울에 남을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선배들에게 많이 서운했다. 한 사람이라도 머릿 수를 줄여야 서울 연구소 자리를 받을 확률이 높아졌기에 모두 쉬쉬했던 것 같다.

알아보지 않고 급하게 이직을 해서인지 이직한 회사가 너무 힘든 곳이었기에 이 원망은 참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수년 동안 성급하게 직장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며 직장 생활을 했다. 내가 이직한 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신의 직장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와서 을의 세계로 들어온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첫 직장에 남아서 임원이 된 나의 동기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그곳에 남아 있었더라면 나는 임원이 될 수 있었을까?

나의 커리어는 어떻게 변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내가 겪었던 황당하고 억울한 일들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아서 겨우 다잡은 마음이 무너지려 했다.


이렇게 싱숭생숭하게 연말을 보내고 있는데 지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재택근무 중에 퇴사를 해서 송별회도 못 했으니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지사장님이 취임하신 후 계속 재택근무를 했기에 지사장님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사실 나도 송별회도 없이 퇴사한 것이 조금은 서운했고 지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바로 약속을 잡았다. 지사장님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왜 그만두었는지, 어떤 처우를 받았는지 말씀드렸더니 정말 놀라시며 믿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사장님도 그만두셨기 때문에 본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셨다.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신기하게도 나의 열등감이 사라졌다.


사장님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 성취감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몸이 아프고 힘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본인도 커리어에 연연하지 않고 제2의 인생을 계획하고 계시다며 나의 퇴사를 칭찬해주셨다.

사실 사장님이 해주신 말씀들은 책에서 읽었던 교훈들과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실제 내가 아는 분이 따뜻한 밥 한 끼를 사주며 해주신 말씀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사장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돌아와서 다시 나의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도 나는 첫 직장에 남아서 임원이 되었더라도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의 예민한 성격이 그 큰 조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고 그러면 나의 정신은 과부하가 되어 스트레스로 병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지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들을 아쉬워하지 말아야겠다.


해마다 연말에는 참 외롭고 힘들었다. 선배, 동기 혹은 후배가 승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팀원 하나 없이 IC(Individual Contributor)로 일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한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퇴사를 하고 맞은 연말에도 여전히 동기의 승진 소식에 괴로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이제 나는 IT 업계에서 떠났으니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


사장님 덕분에 나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짧은 인연인데도 이렇게 배려해주신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며 항상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행보를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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