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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마음이 참 고맙다

by 아르페지오

드디어 퇴사를 했다.

매니저와 합의가 잘 되지 않아서 오래전부터 퇴사일로 계획하였던 20주년 기념일도 훌쩍 넘겼고 11월 말도 아니고 12월 말도 아닌, 어정쩡한 날짜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정해진 퇴사 일자가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라서 나의 퇴사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20년 넘게 근무했고 잘 지내던 사람들도 많았기에 퇴사일조차 배려해주지 않음이 무척이나 서운했다.


그래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기엔 이십 년 동안 쌓은 인연이 깊었기에 퇴사 소식을 알리고 싶은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나 이메일로 인사를 했다. 혹시라도 회사에서 송별회를 하겠다고 하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퇴사 2주 전부터 퇴직 프로세스가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노트북도 반납해야 했고 데이터도 정리해서 사내 클라우드에 올려놓아야 했다. 미리미리 준비했는데도 20년의 세월을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자잘한 업무들도 튀여 나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퇴사일이 다가올수록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무언가 빠뜨린 것 같고 찜찜했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퇴사일 오전에 노트북을 반납했다.


노트북을 반납하고 나니 퇴사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개인용 노트북을 사용해서 퇴직 인사 메일을 보낸 후 이메일에 하나하나 답장을 썼다.


퇴사일 저녁 6시가 되었고 재택근무 중에 하는 퇴사라 딱히 해야 할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십 년 근속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구나 싶은 허탈한 마음에 멍하게 앉아있는데 예쁜 꽃 바구니가 하나 배송되었다. 같이 일한 적도 없고 그저 점심 몇 번 같이 먹은 직원이 은퇴를 축하한다며 꽃 바구니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녀가 언젠가 내게 내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지만 열 살 넘게 어린 직원이라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는데 예상치 못한 선물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녁 6시가 지났고 공식적인 근무는 끝이 났다. 이메일 계정이 사라졌다고 말해주는 이가 없으니 언제 나의 계정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계정이 열려있는 동안 외국에 있는 동료들에게서 온 메일에 열심히 회신을 해주었다. 퇴직 인사를 하라는 배려인지, 미국 회사라 미국 시간으로 계정이 끊기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이메일 계정은 다음날까지 살아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십 년 동안 사용했던 이메일 계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종료되었다.

재택근무 중 온라인으로 하는 퇴사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십 년 근속한 직원의 퇴사라고 하기엔 조용하고 쓸쓸한 그리고 씁쓸하기까지 했는데 한 사람의 예쁜 마음이 나를 달래주었다.


동료가 보내 준 꽃 바구니(왼쪽)와 나누어 꽂은 모습 (여러 개로 나눠서 집 안 곳곳에 놓았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잠깐 모아 놓았다.)


퇴사일 이후 예쁜 꽃을 매일매일 보면서 그 직원을 생각했다. 꽃바구니에 담겼던 꽃들은 퇴사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우리 집 이곳저곳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일하다가 점심시간을 놓치고 혼자 컵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점심을 한두 번 사준 기억이 전부인데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눈이 갔었나 보다.




나는 나의 직업을 사랑하지만 20년 다닌 회사를 퇴사하였다.

그리고 25년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평생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회사에서 지시하는 대로 모범생으로만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며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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