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처음 만났다. 직장도 가까웠고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서인지 처음부터 대화가 잘 통해서 연애를 시작했다. 스물다섯이었던 나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나이가 좀 있었던 남편은 만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부터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을 서두르는 시부모님과 남편의 기세에 휘둘려서 만난 지 6개월 만에 식을 올렸다.
짧은 연애로 인해 결혼 후에야 서로의 다름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몰랐던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가는 시간은 길고 길었다.
생활 습관, 식성, 말투,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니 신혼 초에 정말 많이 싸웠다. 게다가 나는 이제 겨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었으니 결혼 생활과 사회생활을 같이 시작한 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결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니 싸울 일 투성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언성을 높였고 싸우고 나면 며칠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부부싸움이 다 그렇듯이 남편이 잘못해서 싸움이 시작되기도 했고 내가 잘못해서 싸움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런데 잘못한 것을 깨닫게 되면 바로 사과를 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절대 사과를 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초기에는 그런 남편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끙끙 앓았다. 그러다가 결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부터 남편에게 사과받는 것을 포기했다. 억지로 사과를 받아내려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니 사과를 포기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어느덧 결혼 28년 차 부부가 되어 잘 지내고 있지만 남편은 절대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냈고 욕도 했다. 남편이 하는 욕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고 혼잣말이라고 했지만 욕을 고스란히 듣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남편은 그 정도 욕은 남자들은 평상시에 쓰는 말이라고 했지만 나에게 남편이 하는 모든 욕들은 언어폭력처럼 느껴졌다. 여자의 언어와 남자의 언어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친구들이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사람을 만나라고 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남편은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도 항상 핑계를 찾아서 남의 탓으로 돌렸다. 회전문을 너무 세게 미는 바람에 뒤에 있던 내가 다쳤을 때도 내가 빨리 따라오지 않아서 다친 것이라고 화를 냈다. 내 핸드폰을 만지다가 실수로 핸드폰에 있는 몇 년 치 사진을 삭제했을 때도 백업을 해 두지 않는 내 잘못이 크다고 했다.
이런 남편과 살면서 나는 화를 잘 내지 않고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결혼 생활에서 단련된 덕분에 내가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맞추고 살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결혼 생활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다. 결혼 생활도 회사 생활도 모두 사람과의 관계에 기본을 두고 있기에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방법을 배웠던 경험이 회사 생활에서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남자들만 가득한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도 결혼 덕분이었다. 딸만 있는 집에서 자라고 여대를 나온 나는 남자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남편과도 많이 다퉜던 것 같다. 남자와 여자가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남편과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살다 보니 회사에서 만나는 여러 군상들의 심리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잘못을 하고도 절대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하게 되었을 때는 쓸데없이 사과를 받으려 하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편을 택했다.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잘못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이때를 틈타서 중요한 결정을 밀어붙이면 대부분 내게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니 사과는 포기하고 실리를 취했다.
인생에서의 모든 경험 중에 쓸데없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결혼 생활에서 체득한 지혜로 25년간의 회사생활을 훌륭하게 해냈고 회사생활에서 배운 경험으로 28년 차 결혼 생활을 슬기롭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결혼을 안 했더라면 25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다니지 않았더라면 결혼 생활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편에게서 사회생활을 배웠다. 은퇴를 한 후에야 나의 사수는 남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