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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Jun 07. 2024

엄마와 딸 4

요즘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탑스타 이효리가 난생처음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 모습을 관찰하는 예능인데 공감되는 내용이 많아서 밤에 혼자서 조용히 보곤 한다.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엄마에게 버럭하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다. 모녀가 아무것도 아닌 일도 티격태격하다가 언성을 높이게 된 것인데 오늘 나도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언성을 높이면서 '엄마들은 대체 왜 그럴까?'하고 생각했는데 이효리 어머니 인터뷰를 보고 나니 우리 엄마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우리 엄마는 '딸들은 대체 왜 소리부터 지를까?'라고 서운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사건의 발단은 누수였다. 사는 곳이 오래된 아파트라 걸핏하면 누수가 발생하는데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에 관리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집에서 누수가 되어서 아랫집에 물이 많이 세고 있으니 내일 당장 공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누수 때문에 마루 바닥을 뜯어내고 파이프를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누수라니 잠이 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아무것도 모르고 푹 주무셨다는 엄마에게 누수 때문에 물을 쓰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엄마는 왜 물이 새는지 물으셨다. 잠을 자지 못해서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쏘야 붙이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어젯밤에 관리 사무소에서 다녀갔고 새벽이라 아직 수리 업체에 연락도 못했는데 물이 새는 이유를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물이 새는 이유를 묻고 있었고 나는 밤새 쌓인 짜증을 가득 담아서 엄마에게 화를 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엄마에게 쏘아붙인 것이 미안해졌다. 사과를 하려고 엄마 방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나를 보자마자 빨래는 해도 되냐고 물으셨다. 아랫집에 물이 철철 넘쳐서 물을 쓰지 말라는데 빨래를 해도 되냐는 질문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빨래를 하루 못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엄마가 너무 이른 새벽에 세탁기를 돌려서 다투곤 했는데 쌓인 감정이 폭발해서 사과는커녕 아무 없이 집을 나와버렸다.


동네 공원을 몇 바퀴 돌고 겨우 화를 누그러뜨리고 공사 업체와 약속을 잡은 후 집에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엄마가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물을 쓰지 말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를 보니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엄마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같은 말을 반복해서 설명해야지 이해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대체 우리 엄마는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 엄마는 나에게 큰 산이었다.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현명하고 멋진 사람이었고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고목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엄마가 일흔이 넘고 여든을 바라보면서 아이처럼 변해갔다. 모든 것을 딸에게 의지하려고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되묻는다. 아마도 세상 모든 것이 다 궁금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신 듯하다. 그런데 갱년기 딸은 조그만 일에도 욱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방금 전 TV에서 이효리가 언성을 높인 후 그녀의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기에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고 꾹 참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업체에서 수리하러 올 때까지 물을 쓰지 말라고 다시 한번 말씀드렸다.


이럴 때는 자꾸 부딪치지 말고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방법일 것 같다. 수리 업체가 올 때까지 공원에 가서 산책이나 하고 들어와야겠다.

이효리 모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녀의 엄마는 TV 출연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 덕분에 우리 엄마의 생각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깔깔거리고 웃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TV 프로그램 말고 이렇게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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