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씨가 뒤늦게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안 군자씨의 딸은 시름시름 병들어갔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장염이 도져서 죽만 먹고 출근하는 날이 허다했다. 삼십 때에 발병한 원형 탈모는 치료를 받으면 조금 좋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번지곤 했다. 툭하면 두통, 소화불량에 시달렸고 불면증으로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저혈압에다 빈혈이 심해서 길에서도 잠깐씩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체질식을 해보기도 하고 수면 클리닉에도 다녀보고. 요가, 수영 등 좋다는 운동도 해보고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보았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망가질 데로 망가진 몸으로 십 년 넘게 버티다 결국 군자씨 딸은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2021년 어느 날,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군자씨 큰딸은 군자씨에게 올해 말에 은퇴할 계획임을 알렸다. 한창 인생을 즐기느라 활기에 차 있던 70대 중반의 군자씨는 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40대 후반이면 한창나이인데 은퇴하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군자씨는 그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것도 복인데 제 발로 복을 걷어차고 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군자씨 남편처럼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잘린 것도 아닌데 제 발로 걸어 나오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자씨 딸은 이만큼 일했으면 됐지, 대체 나보고 얼마나 더 일하라는 것이냐며 군자씨에게 화를 내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군자씨 딸은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한 자신에게 엄마가 매몰찬 말을 퍼붓던 이 날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러나 바자회 준비, 독서 모임 등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군자씨는 그만 이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부터 군자씨 딸은 될 수 있으면 군자씨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모처럼 쉬는 휴일에도 군자씨가 집에 있으면 약속을 만들거나 핑계를 만들어서 밖에서 서성이다가 집에 들어왔다. 집에 있을 때도 책을 보거나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에 둔해진 군자씨는 안타깝게도 딸의 이런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나 군자씨 큰딸은 예정대로 은퇴를 했고 군자씨와 군자씨 딸은 한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