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이 흘러 희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희수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에는 다른 동네에서 온 친구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희수에게 고등학교 시절은 세상에는 압구정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폭넓게 사귈 수 있었던 시기였다.
단지 내에 있는 고등학교라 대다수가 압구정동 아이들이긴 했지만 이들도 예전처럼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험생이 된 아이들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차림새를 비교하면서 힘들어했던 희수의 마음도 훨씬 편안해졌다.
대신 고등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의 엄마가 권력을 가졌다. 희수 엄마 군자 씨는 자연스럽게 상위권 학부모 무리에 들어갔다. 중위권 엄마들은 모두 희수 엄마, 군자 씨를 부러워했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 문제집은 어떤 것을 푸는지 질문이 끊이지 않을 때면 군자 씨의 어깨는 으쓱해졌다.
수학을 좋아하는 희수는 이과를 선택했고 이과반에는 100여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부터 희수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부를 덜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등수가 떨어지니 희수 엄마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희수 엄마는 성적이 좋은 아이들의 학부모들에게 비법을 물었고 어느 날 희수를 친구네 집으로 비밀스럽게 데리고 갔다. 희수 엄마가 희수 몰래 불법 과외를 등록했던 것이었다.
매번 첩보 영화를 찍는 것처럼 몰래 친구네 집에 가서 하는 과외가 희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선생님도 별로라서 과외를 받는다고 성적이 오를 것 같지도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엄마, 아빠의 다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과외비 때문에 싸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희수의 마음이 불편했다. 몇 달 되지 않아 희수는 과외를 그만두었다. 돈에 쪼들렸던 엄마도 어쩔 수 없이 희수의 결정에 따랐다.
모녀는 자꾸만 떨어지는 내신 성적 때문에 불안해했지만 내신 성적과 달리 모의고사 점수는 꾸준히 잘 나왔다. 사실 나중에 보니 내신 성적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학력고사 시절에는 대입에서 학력고사 점수 반영 비율이 내신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내신 성적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희수는 무난하게 학력고사를 치렀고 엄마와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희수가 원했던 것은 Y대 수학과였지만 희수 엄마와 아빠는 특정 대학, 특정 학과만을 고집했다. Y대에 가고 싶다는 희수 의견은 철저하게 묵살당했고 희수는 대학을 결정할 때 부모님 결정에 따른 것을 오랫동안 후회했다.
희수 엄마는 학력고사 성적표를 받은 후에야 불법 과외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외를 받고 내신 성적에서 탑을 찍었던 친구들은 모두 전기 대학에 붙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이 과외를 하면서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주어서 잘 받았던 내신 성적은 대학 입학과는 별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희수도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면서 세상을 배웠다. 돈이면 다 해결되는 압구정동에만 갇혀있던 희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입시를 통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