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큰딸의 인생 12

by 아르페지오

마흔 살 희수는 벽에 부딪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년배 남자 동료들은 모두 부장으로 진급을 했고 팀장이 되었는데 희수는 여전히 차장이고 팀원이었다. 삼십 대 초반의 팀원들은 나이가 많은 희수에게 거리를 두었고 팀장들은 나이 많은 부하 직원인 희수를 불편해했다. 몸 바쳐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못 먹는 술도 마셔보고 골프도 배워보았지만 동년배 남자 직원들은 희수를 그들만의 리그에 끼워주지 않았다. 결국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희수는 외딴섬처럼 지냈다. 단지 열심히 일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진급을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해봤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어느 해, 희수는 은퇴를 결심했다. 그때 희수의 나이는 마흔다섯이었다. 은퇴를 결심한 후 희수는 제일 먼저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희수의 퇴사 계획을 흔쾌히 찬성했다. 남편은 희수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하루빨리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엄마를 부양해야 해서 여유 자금을 좀 더 모아야 한다고 했더니 매달 100만 원 정도는 희수에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희수는 3년 후에 은퇴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60밖에 안 된 엄마에게 매달 용돈을 주려면 남편이 주는 100만 원으로는 부족했고 부족한 금액을 채우기 위해 딱 3년만 더 회사를 다니기로 했다.


은퇴 날짜를 정한 후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뎠다. 한 해가 지날수록 더 외롭게 버텨야 했고 더 힘들게 견뎌야 했다. 그래도 버티고 또 버텼다. 견디고 도 견뎠다. 그리고 계획했던 은퇴 자금을 다 모은 후 엄마에게 은퇴를 알렸다.


희수 엄마 군자 씨는 젊은 나이에 은퇴하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십도 안 된 창창한 나이에 왜 회사를 그만두느냐고,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지 제 발로 나가는 것은 제 복을 발로 차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평생 돈 한 푼 벌어보지 않은 군자 씨는 희수가 어떻게 25년을 견뎠는지 몰랐던 것이다. 엄마의 모진 말에 희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 시절, 애정 표현도 없고 냉랭하기만 했던 엄마 모습이 떠오르면서 군자 씨가 나의 친엄마가 맞을까 생각했다. 25년이나 일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하냐고 화를 벌컥 내고 집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다. 희수에게는 집도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시달리다 집에 가면 엄마가 무심코 내지르는 가시에 찔리곤 했다. 희수는 어디에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공원 벤치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결심했다. 은퇴를 하고 엄마와도 이별하기로.


이제 희수는 은퇴 계획과 함께 엄마로부터의 독립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예상에 없던 지출이 필요했지만 더 이상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25년 내내 참고 인내하고 살아왔으니 적어도 은퇴 후에는 나만의 공간에서 편하게 살고 싶었다. 다행히 희수 부부에게는 4년 후에 입주할 수 있는 소형 아파트가 하나 있었다. 4년 후 새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엄마가 지낼 곳을 따로 마련해 주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25년이나 장모와 불편한 동거를 했던 남편도 적극 찬성해 주었다. 그렇게 희수는 엄마와의 독립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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