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엄마의 인생 12

by 아르페지오

예순 이후로 항상 봄날만 같던 군자씨에게 갑자기 겨울이 찾아왔다. 군자씨는 자신에게 노년 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 복이 없어서 쫄딱 망했지만 딸을 잘 키운 덕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이 딸을 잘 키운 이라 생각했기에 큰딸의 마음은 헤아려보지 못했다. 아니 헤아려볼 시간이 없었다.


군자씨는 매일매일 바빴다. 복지관과 문화센터 강좌를 여러 개 들었고 동네 친구들, 동창들과의 모임이 매주 있었다. 어쩌다가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면 일주일이 눈 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는 인생이 즐거워서 ㄱ딸의 아픔을 헤아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같은 집에 사는 큰딸이 시름시름 앓는데 알아채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주변에 둔감해진 탓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큰딸의 얼굴은 항상 잿빛이었다. 군자씨는 딸이 힘들어서 그런 줄도 모르고 젊은 애가 왜 이리 맨날 죽상을 하고 다니냐고 타박만 했다. 힘들어 죽겠다는 딸의 말에 어디 여든이 다 된 엄마 앞에서 엄살을 부리냐고 혼을 내곤 했다. 그 모든 것이 힘들다는, 너무 지쳤다는 신호였는데 군자씨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군자씨를 닮아서 차갑고 이성적인 둘째는 최소 생활비만 보내 주었다. 경기도에서 제일 싼 동네에 원룸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큰딸이 주던 용돈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만 매달 입금되었다. 사실 둘째 딸도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군자씨 집을 마련하느라 갑작스럽게 큰돈을 써서 여유가 없었다. 둘째 딸은 당장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다면서 혹시 생활비가 모자라면 연락하라고 했다. 방을 얻은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차마 둘째에게 또 연락할 수 없었던 군자씨는 남동생에게 손을 벌렸다.


군자씨는 평소에 남동생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젋을 때도 변변한 직업 하나 갖지 못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간병인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동생이 한심해서 만날 때마다 큰딸이 준 용돈을 몇 푼씩 떼어서 주곤 했다. 그런데 이제 군자씨 남동생이 군자씨 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이 오십에 거리에 나 앉았을 때 진작 돈을 벌었어야지 평생 딸에게 얹혀 살 생각을 했냐며 누나를 타박했다. 군자씨의 친구들도 사정을 듣고 군자씨가 잘못했다며 큰딸 편을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군자씨 편은 없었다. 이제 군자씨는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추운 겨울을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 차디찬 단칸방에 쓸쓸하게 누워있다가 불현듯 잊고 있었던 남편 얼굴이 생각났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군자씨가 돈을 달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마련해 주었다. 친정에 돈이 필요할 때마다 급전을 마련해 주었던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남편의 영정 사진을 꺼내서 처음으로 남편에게 미안하더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된 큰딸 사진을 보면서 28년 동안 나를 보살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군자씨는 착한 남편과 착한 큰딸이 자신을 떠나게 만들었다. 이제 군자씨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똑닮은 둘째 딸뿐이다. 자신과 똑같은 둘째 딸은 군자씨 남동생과 똑같은 말을 했다. 집이 그렇게 되었을 때 엄마 나이가 겨우 오십이었는데 그때부터 일해서 돈을 벌었어야 했다고. 엄마가 모아놓은 돈이 한 푼도 없고 28년 넘게 모든 것을 언니한테 기대고 있는지 몰랐다고.


군자씨는 이제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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