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잊고 살았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나를 챙길 시간도 없었고 가족부터 챙겨야 하니 나까지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오십이 훌쩍 넘은 후에야 조금씩 여유가 생겼고 그때부터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새벽의 짐(gym)을 사랑했다. 출장을 많이 다니던 시절, 저녁에 사람들과 어울려서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조용한 휴식을 택했다. 호텔 방에서 일찍 잠을 청하고 새벽에 혼자 짐에 갔다. 내가 하는 운동은 가벼운 스트레칭이나 수영 정도였지만 그 시간이 좋았다.
새벽 6시 호텔 짐에는 생각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출장을 온 사람들인데 하루 일과를 운동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나도 같은 무리에 속해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가벼운 운동을 하고 나면 오랜 비행에 지친 몸이 훨씬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5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출장을 꽤 많이 다녔기에 전 세계 곳곳의 호텔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과 새벽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호텔 수영장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유 수영을 꽤 오래 했는데 한국의 수영장은 언제나 북적인다. 다른 운동에 비해 유독 수영은 새벽에도 사람이 많은 편이라 아무리 일찍 가도 레인을 혼자 차지할 수가 없다. 북적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게 수영은 기쁨이자 동시에 스트레스였다. 새벽에 수영장에 가서 레인을 열 번쯤 왔다 갔다 하면 몸이 풀리고 개운했다. 그러나 간혹 배영을 하다가 걷기 운동을 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부딪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신경이 쓰여서 수영을 제대로 못했다. 결국 열 번을 다 채우지 못하고 수영장을 나서야 했고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으로 보내곤 했다. 새벽 6시에 수영장에 갈 때마다 5시에 문을 여는 수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무도 없는 레인에서 실컷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출장을 가면 수영장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외국에서는 새벽에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닝머신, 스텝퍼 등의 기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수영장에는 나 혼자인 때가 많았다. 큰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혼자 수영을 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이곳이 내 집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은퇴를 했으니 더 이상 그런 여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나는 사무실에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했다. 새벽에 일찍 텅 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던 시간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7시 전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그동안 사무실은 온전히 내 자치였다. 제일 좋은 회의실, 그리고 제일 좋은 의자에 앉아서 동트는 풍경을 감상하거나 부지런히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 모습을 내려다보던 시간이 가끔 그립다. 고층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여명과 한강뷰는 말없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오늘도 잘 버텨보자면서.
25년을 뒤돌아보니 어느 한 해도 쉬웠던 적이 없었고 매일매일 고전분투했건만 이 시간들 덕분에 25년을 채우고 은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젠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은퇴 후에 여유와 건강을 되찾게 되었으니 아쉽지만 가끔씩 그리워만 해야겠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