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데이트

by 아르페지오

며칠 전에 김영하 30주년 영화제를 다녀왔다. 요즘 남편이 약속이 많아서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아직 우울증에서 회복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혼자 있으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김영하 영화제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려면 꽤 먼 동네까지 가야 하는데 날도 추운데 혼자 그 먼 곳을 갈 수 있을까? 혼자 갔다가 괜히 우울증만 더 심해지는 거 아닐까? 예매를 한 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용기를 내고 집을 나섰다. 영화제가 열리는 곳은 연희동 라이카시네마라는 곳이었는데 연희동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였다.


회사를 다닐 때 우울증이 심했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이 있다. '아티스트 데이트'와 '모닝 페이지'를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 줄리아 캐머론이 쓴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 제목 때문에 예술가들을 위한 책일 거라는 오해를 해서 은퇴를 한 후에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후회했다. 회사를 다닐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목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했던 나를 책망했다.


사실 김영하 30주년 영화제를 혼자 갈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의 영향이었다. 줄리아 캐머론은 매주 2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라고 말한다. '아티스트 데이트'는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버스를 타고 여행하기, 새로운 동네에 가서 정처 없이 걷기,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 들어가서 책 읽기 등 내면의 아티스트에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괜찮은 척했지만 엄마와 헤어지고 난 후 많이 힘들었다. 오십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고 살아온 내 인생이 억울했다. 시시 때때로 분노가 휘몰아쳤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약을 먹어도, 병원을 가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서 '아티스트 데이트'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라이카 시네마는 연희동 주택가 안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 보는 동네 구경을 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주택가 속에 숨어있는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을 찾아내는 것도 흥미로웠다. 십 오분쯤 걸었을까 진짜 이런 곳에 극장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을 때쯤 라이카시네마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것은 극장 안에 김영하 작가가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김영하 작가가 선정한 영화라고 해서 영화 제목만 보고 예매했는데 작가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엉겁결에 책도 하나 사서 작가님 사인도 받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먼 동네까지 혼자 가는 것을 망설였지만 관람객 대부분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장소가 작아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다 들렸는데 수능이 끝나자마자 작가님을 만나고 싶어서 달려온 학생도 있었고 지방에서 오신 나이 지긋한 신사분도 있었다. 김영하 작가와 이웃인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커플도 있었고 아이돌을 만난 것처럼 탄성을 지르면서 작가님과 같이 사진을 찍는 귀여운 대학생도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대체 내가 왜 망설였을까 생각했다.


인생은 짧고 망설이는 순간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여태까지도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는데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아야겠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영화였다. 쿠바에서 활동했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밴드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영화인데 영화도 극장도 그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씨까지 모든 것이 다 완벽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며칠이 지났지만 80세의 루벤이 피아노를 치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루벤은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절대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겨우 오십이 넘었을 뿐인데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힘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카네기홀에 섰던 루벤의 모습을 보면서 반성을 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라는 교훈을 '아티스트 데이트'에서 배웠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꾸물거리지 말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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