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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차 프리세일즈의 대한민국 지도

by 아르페지오

나는 개발자로 3년, 외국계 IT 기업 프리세일즈로 22년 근속한 후 은퇴하였다.


25년 회사 생활을 하는 내내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특이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것이 내가 일복이 많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다닌 회사, 혹은 내가 했던 일이 특이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동료들 또는 친구들과 이야기해 봐도 유별나게 특이한 에피소드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 기록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대한민국 방방곡곡 여러 곳들이 A 프로젝트를 했던 B 고객사, 시스템 장애가 나서 볼모로 일주일이나 잡혀 있었던 D 고객사 등의 다양한 에피소드로 기억된다. 남편과 경리단길을 걷다가 국군 재정관리단 건물을 보고 업무 때문에 몇 번 가봤다고 했더니 남편이 깜짝 놀라기도 했고 개발자 시절에는 군부대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어서 몇 달 동안 군부대에 상주했던 경험도 있다.


오랜만에 여의도에 갈 일이 있었는데 예전에 자주 방문했던 고객사 빌딩을 지나가게 되었다. 당시 그 고객사는 서울 본사와 전국 곳곳에 있는 지사 및 사무소와 실시간 회의를 하기 위한 화상 회의 솔루션을 찾는 중이었고 제품 성능 테스트를 위해 여러 번 방문했었다.


프리세일즈 업무를 하게 되면 회사 사무실보다 고객사를 더 자주 가게 된다. 화상 회의 솔루션을 담당할 때에는 고객사 대부분이 성능 테스트를 원했기 때문에 테스트 기간 동안 내내 고객사로 출근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이 회사에 일주일 내내 출근하던 시절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쉽게도 현재는 부서가 바뀌어서 이 회사가 아직도 우리 회사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익숙한 건물 출입문을 보니 불현듯 당시에 만났던 고객분들 얼굴이 생각났다. 좋은 고객분들이었기에 기억이 오래 남았던 것 같다. 제품 테스트에 필요한 장비나 네트워크 연결 등의 세팅 작업을 도와줬던 고객사의 신입사원은 이제 중견 사원이 되어있겠고 솔루션 검토를 총괄하시던 팀장님은 아마도 퇴직하시지 않았을까 등등 이렇게 시작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여의도에 있는 다양한 고객사에 대한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콘퍼런스가 끝난 후에도 한참 여운이 남아서 여의도 빌딩 숲을 혼자 한 시간 정도 걸어보았다.


여의도 건물 곳곳에도 추억들이 쌓여 있었다. 이 건물에는 A 방송사가 있었는데 비디오 스트리밍 솔루션을 제안하면서 방문했었고 저 건물에는 B 보험사가 있었는데 온라인 서비스 구축에 필요한 솔루션을 제안하기 위해 방문했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의도에는 콘퍼런스 발표를 여러 번 했었던 호텔이나 행사장도 많아서 추억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걷다가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왔다.




프리세일즈는 직업 특성상 외근이 많다. 하루 종일 익숙하지 않은 고객사의 사무실에서 성능 테스트를 하거나 트러블 슈팅 등의 작업을 하는 것은 사무실에서 내근을 할 때보다 몇 배 이상 더 힘들고 피곤하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파김치가 되어 너무 힘들다며 푸념을 하곤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좋은 경험이었다. 25년의 커리어 동안 내가 다닌 회사는 3곳뿐인데 내가 방문했던 고객사들은 수백 개도 넘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나처럼 수백 개의 다양한 고객사를 방문해서 다채로운 산업군의 고객들과 일해 본 경험이 있겠는가.


거제도에 놀러 가 보진 못했지만 있는 헬기를 타고 제품 교육을 하러 간 경험도 있다. 항공사 사무실에는 비행기 정비 시설이 있어서 비행기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이러한 항공사 사무실 혹은 항공사 관제센터 안에 들어가서 제품 시연을 해 본 경험도 있다.

자동차 연구소에서 제품 시연회를 할 때는 자동차를 탄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3층까지 올라가는 황송한 경험도 해보았다.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연구소이다 보니 건물에 자동차를 실을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자동차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차에 있는 장비들을 바로 세미나 장소로 옮길 수 있었다.) 자동차 연구소에서는 출시되지도 않은 신차의 주행 테스트를 수십 번도 더 보았다. 군부대 벙커에 들어가서 상황실 모니터를 보면서 위성 통신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프리세일즈라는 직업의 장점 중 하나가 이러한 다양한 산업군에 대한 간접 경험이 아닐까?


새벽에 깨서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도 뒤돌아보면 얻는 것들이 있을 거라 믿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직장생활은 그저 고단하고 힘들기만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참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어느 유명한 시집의 제목처럼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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