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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Apr 15. 2023

'순간'이 머무는 그곳에는'

instant 안의 moment

새벽에 눈을 떴다.

보통은 일찍 잠을  자지 않는다. 밤 11시가 물론 이른 시간은 아니다. 나는 10시부터 몸피곤이 몰려와 잠을 자고 싶었는데 평소에 일찍 자는 그는 어제 따라 유난히 말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장단을 맞추다 보니 11시가 되었다.


새벽에 문득 눈이 떠지고 나는 폰을 집어서 글들을 보거나 읽었다. 사진 보듯이 때로는 글도 보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설움이 몰려와서 울었다. 눈물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몰려온 것일까. 뭔가 안에서부터 밀고 올라온듯한 울음은 새벽의 속 안을 가라앉혀 주었다.


새벽 양치를 하였다. 개운하였다.

요즘의 일상을 생각해 보았다. 무엇인가 점점 쌓이고 밀리고 부피가 커져 가는 압박이 있었다. 써야 할 글들과 쓰고 싶은 글들이 계속 밀리고 있는 그 느낌은 정체와 적체를 동시에 느끼게 하였다.


쓰기만 하고 정리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나에 대한 자괴감도 있었다. 글은 보통 혼자서 쓴다고 하지만 나는 글을 대체로 공개적으로 썼다. 게다가 지난 십여 년 간은 페이스북에서만 주로 글을 쓰다 보니, 며칠만 지나도 글들은 아득히 기억 저편에 파묻히는 정신적인 경험의 시간들을 보냈다. 대체로 글을 길게 쓰는 편인 나는 스스로 글 시집살이를 했던 것도 같으다.


마음에 딱 맞는 글쓰기 장소를 만난다는 것, 게다가 그것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면(sns나 브런치 같은 형태라면), 그리고 한 곳에 안착하여 이미 거기에서 글밭을 일구었다면, 쉽사리 이동하기는 쉽지가 않다.


글 쓰는 유목민이 나뿐 아니라 무수히 많겠지만, 마음에 맞는 정착지를 찾아서 정착하기까지는 계속 갈등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자신이 그 자신 바깥으로 꺼내어 놓은 그 자신에게는 어찌 되었든 일말의 책임이 있다. 그 자신의 글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는 의무와도 같다. 계속 쓰는 권리가 있다면 쓴 글을 가다듬고 정돈할 의무도 동시에 생성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의 답답함은 무더기 글 수레를 끌고 다니는 바로 그런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글을 쓰기는 쉬워도 글을 간추려 정돈하는 것은 더 복잡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 속에서 쌓인 글들을 정돈해내어야 하는 것 자체가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답답함이었던 것 같다.


 어떤 글은 한 편 쓰려면 몇 년의 시간 투여의 결산일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또 어떤 글은 순간의 발산으로 튀어나오는 글도 있다. 이런 글의 성격이 갖는 것에 따라서 매거진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이 새벽에 생각했다.


답답함의 해소는 그곳에 머문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짐으로써  해결되는 것인 듯하다. 사람은 밀고 나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고 앞으로 나아감으로써만이 문제를 해소시키는 존재이므로. 그러니 해결하지 못한 채로 계속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모순적 상황이다. 이러함에도 사람은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해서, 시간 투여가 각각 다른 글들과 생활의 일상성과 순간을 나누어 보기로 한다. 나를 해소하는 공간도 있어야 하고, 순간을 기록하는 장소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번에 새로 만든 매거진은 나의 방과 같은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새로 만든 매거진의 제목은 <순간이 머무는 그곳에는>이다.

________



'순간'은 moment일 수도 있고, instant일 수도 있다.  보통은 모멘트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나는 인스턴트적인 의미로도 사용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긴 글과 또는 시간이 오래 투여된 글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보자면 대척점에 있는 인스턴스는 나의 답답함을 더 확실하게 나에게 인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간 그 자체는 instant적인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moment는 오히려 특이점에 가까운 시간이 될 것이다. 사람이 느끼는 방식으로는 시간은 계속 지나가는 것이 된다. 현재는 계속 지나가야 하는데 현재를 지나 보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체와 적체 안에 갇힌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중적이면서 복잡한 연결선을 가지고 사용한다.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하지도 않고 한 가지만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시간은 과거부터 현재에서 미래까지를 모두 사용하지만, 거기서도 더 세분화되어 사람은 시간을 instant적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스턴트가 음식과 용기에만 사용되고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sns의 빠른 타임라인처럼 글과 사진과 정보도 인스턴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빠르게 흘려보내는 그 자체가 sns의 미덕인 것처럼, 일상에서 그 자신에게도 정체됨 없이 흘려보내야 할 것들이 있다. 인스턴트의 본래적 의미는 바로 그러한 지점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소비되는 일상의 생활들은 모두 인스턴트적이다. 생활 이외의 것들이 오히려 긴 시간이 필요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시간이 특이점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인다. 특이점의 시간이 바로 차이적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며, 그 차이가 연결을 생성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적인 시간은 특이점의 시간인 모멘트로서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특이점'은 인스턴트의 시간들에서 사건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시간'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순간 안의 순간은 인스턴트 안의 모멘트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라는 시간에서 '순간'의 두 의미는 이러하다.


현재의 순간은 인스턴트적이며 반복적인 시간이다. 그리고 인스턴트적인 반복의 시간 그 안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하는 특이점인 '순간'은 모멘트적인 시간이다. 이 특이점이 인스턴트라는 지나가는 무수한 보통점의 시간 위에서 변곡점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철학에서의 '순간'은 단순히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를 만드는 변곡점으로서의 특이점을 말함이며, 이 특이점을 '순간_모멘트'로 지칭한다고 여긴다. 우리가 모멘텀을 지난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모멘텀 momentum'은 '어떤 힘'과 연계되는 의미이다. 이 힘은 그 자신의 의지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_모멘트'는 전적으로 그 자신 안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간은 그 자신만이 느끼고 알아차리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순간은 그 자신의 신체에서 비롯된 시간이라고 보이며, 변곡점을 만드는 시간은 각자마다 다 다르고 그 순간을 경험하는 그 시간도 다 다르다. 오로지 개인적인 시간인 것이며, 그 자신 안의 사건이며, 이 시간이 그 자신을 만들며 그 자신의 삶을 만든다. 인생을 만든다.


_________


시간은 인스턴트 방식으로 지나간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한다. 무수한 보통점의 시간의 선분 위에서 문득 특이점을 일으키는 때가 환기이며 그 자신을 바라보는 때이며 일상의 변곡점일 것이다.


 사람은 대체로 시간을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고 여긴다.  나는 그것을 문득 이 새벽에(글을 쓰는 동안 이미 동이 터서 훤해졌다) 글로 겨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매거진 하나 더 만드는 단순한 과정을 내 바깥으로 밀어내어 표현해 보았다. 매거진 하나 더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신체사유적'이므로 이 글을 '신체사유'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순간이 머무는 그곳에는>에 포함시킬지 갈등하게 된다.


이 글이 이러한 형태로 마무리될지 나도 몰랐다. 그저 새벽에 분출된 그 충동에 의해 쓰기 시작했고 쓰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었고, 글 마무리는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 <순간이 머무는 그곳에는>는 '인스턴트 안에서의 모멘트'가 될 것이다.


인스턴트처럼 흐르는 현재의 시간에서 문득 쓰고 싶을 때는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그 순간을 기록하겠다는 의미이다. 긴 글 또는 긴 시간이 투여된 글이나 또는 어떤 기록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라도 말이다. 답답함은 그렇게 해소되어야 하고 정체와 적체를 앞뒤로 느끼는 현재를 그렇게라도 밀어내어야 하고 순간을 환기하여야 한다. 새로운 공기를 마시듯 숨을 쉬어야 한다.



* 이 사진 제목을 '무단행단'이라고 할까? '신호등 없는 거리'라고 할까? 그도 아니면 '눈치껏 자유 보행'이라고 할까? 그러다 다시 아무려면 어떨까 싶다.


이쪽 도로는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아직 없다. 차량이 많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신호등 없는 길이 편하여 나는 이 길이 좋다. 손에 짐을 들고 있을 때는 이 길을 이용한다. 신호등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에 걸어와서 건너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날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신호 바뀌길 기다리는 습관에 의하여 그러고 서 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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