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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죽음의 아이러니/ '비극'이 죽다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3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3장 p104~108




<예술, 니체의 연역과 플라톤의 귀납/ 존재론과 이원론>


* 니체의 견해들은 다소 헛갈리고 혼돈스럽게 다가올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니체의 생각의 결이 마음으로 그대로 전해온다. 그러면 메모를 한다. 그러나 막상 글로 쓰다 보면, 혼란스럽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마도 내 안으로 전해질 때는 어떤 느낌적 체험, 즉 음악처럼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다. 그러다 그것을 언어로 정리하려고 하면 얽힌다. 결국 시간을 통하여 그 얽힘이 절로 풀리도록 기다려야 한다.


오늘은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무엇인가? 내 안에서 스스로 데이터를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어는 이미 내 안에 있는 언어였으니까. 니체는 존재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고대 그리스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일까? 니체는 연역적으로 지금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고, 나는 귀납적으로 여기서 그쪽을 바라보면서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 문득 직관적으로 또는 내가 느끼는 어떤 세계에서는 그냥 니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것만 같은 그런 이어짐을 전달받는 것이다. 그때는 나도 연역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연역의 방향과 귀납의 방향이 문득 얽혀서 꼬이는 것이다. 연역은 존재론적인 방향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고대에서 현재 쪽으로 오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나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내가 고대와 같이 이쪽을 보아야 결이 맞는다. 그러면 니체의 생각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그런 환경에서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는 것은 어느 선에서는 걸리게 되어 있다. 특히 철학, 그것도 존재론적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딱! 걸리게 되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시선교정, 생각교정을 하게 된다. 왜곡된 인식이 무엇인지 감을 잡게 된다. 그리고 갈등하게 된다. 현재와 오래된 과거 그 사이에서. 아마도 플라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시선을 교정해야 하는데, 그리고 자기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주의에 ‘중독’되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래도 지구는 도니까, 모두 ‘오이디푸스 신화’를 벗어날 수는 없었는지도. 참으로 소포클레스는 오묘하다.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밀접한 관계>


13장에서 니체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밀접한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의 정서를 근거로서 입증하는 방법이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그 경향에서 에우리피데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고대에서도 간과되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에 떠돌던 소문, 즉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의 “시작詩作”을 도와주곤 했다는 소문은 이 직감의 정확성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 니체가 여기서 ‘웅변적’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아마도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작품의 도입부인 ‘서곡’의 방식을 ‘웅변의 형태로 낭독’했었기 때문인 듯하다. 웅변의 형태로 낭독하여 작품의 진행과정을 청중에게 알려주었고, 청중들은 그 웅변을 곧잘 자신들의 연설에 사용했던 것 같다.

당시의 “좋은 옛날”의 신봉자들이 ‘현재의 민중 선동가들’을 손꼽을 때면, 이 두 이름이 단숨에 거명되곤 하였다. 옛날 마라톤을 하던 정신과 육체의 건장한 기풍은, 정신적 힘과 육체적 힘이 점차 쇠약해지면서, 미심쩍은 계몽에 희생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근대인들에게는 놀랍게도, “아리스토파네즈의 희극”은 분노와 경멸이 반반씩 석인 이런 말투로 이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근대인들은 에우리피데스쯤이야 기꺼이 희생하겠지만,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에게는 최초이자 최상의 소피스트로, 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거울이며, 진수로 등장한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경우 유일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곤 아리스토파네스를 시단詩壇의 비열한 거짓말쟁이인 ‘알키비아노스’로 조소해 버리는 일이었다. 니체는 이 자리에서 이런 공격으로부터 아리스토파네스의 ‘심오한 본능’을 옹호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의 우두머리’로 규정한 것에 대하여, 고대인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규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인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토로 규정한 아리스토파네스를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사람이라고 비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고대인과 근대인의 시각차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아리스토파네스


* 아리스토파네스(BC 450경~388경)의 ‘희극 〈구름 Nephelai〉(BC 423)’은 소피스트들이 보급하고 가르친 '근대' 교육과 도덕을 공격하고 있다. 이 희극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은 조롱당하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학교인 프론티스테리온('생각하는 가게')이 불타서 잿더미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독특한 소피스트에게 가장 적대적인 비판자였는데 작가가 소크라테스를 대표적인 소피스트로 선정한 이유를 두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였다. <출처/ 아리스토파네스 - Daum 백과>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
* 알키비아데스(BC 450경~404경)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정치가, 웅변가, 장군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테나이 중우정치를 대표하는 데마고그이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자신의 정치 신조를 여러 번 바꾸었으며, 기원전 410년 대 그가 태어난 아테나이에서 공격적인 외교를 옹호했으며, 시켈리아 원정을 주장하였지만, 정적들이 신성모독의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스파르타에 망명하게 되었다.

그는 스파르타에서도 강력한 정적을 만들어 다시 페르시아 제국으로 도주를 하게 되었고, 태수 티사페르네스의 보좌관으로 일을 하다가 그의 아테나이 정치 동맹에 의해 아테나이로 소환되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에서 몇 년 동안 장군직을 맡았지만, 정적에 의해 다시 두 번째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총명하지만 조심성이 없는 인물로, 아테네에 극한 정치적 분쟁을 불러일으켜 결국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게 만들었다. 훌륭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아테네군 지휘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BC 447/446) 보이오티아의 코로네아에서 전사했다.

그의 먼 친척이자 후견인이었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정치 때문에 너무 바빠서 알키비아데스를 잘 돌보아주거나 애정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주 잘생기고 기지 넘치는 청년으로 자라났으나 사치스럽고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강한 윤리관과 예리한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알키비아데스의 준수한 외모와 지적인 소양에 매혹되었다.

이 두 사람은 칼키디키 반도의 포티다이아에서 함께 군대생활을 했다(BC 432). 이때 소크라테스는 부상당한 그를 지켜주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이후 아테네 북쪽에서 델리움 전투(BC 424)가 벌어졌을 때 퇴각하던 중 소크라테스를 보호하기 위해 머물렀다.

그러나 30세도 되기 전에 알키비아데스는 정계에서 뇌물을 받음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청렴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뇌물 수수는 소크라테스가 몹시 경멸하던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다채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꾸며낸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그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자제심이 부족했고 걷잡을 수 없는 야망을 품어 아테네를 재난에 빠뜨렸다.

급진적인 클레온과 그의 후계자들은 알키비아데스와 심한 불화를 겪었고 결국 이는 위급한 시기에 아테네의 사기를 저해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의 미덕을 본받지 못했고 BC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비난받은 데에는 알키비아데스의 품행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출처/알키비아데스 - Daum 백과>
* 데마고그(Demagogue)란 민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짓된 주장이나 감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정치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처음에는 민중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오늘날과 같은 비난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점차로 비난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니체는 아리스토파네스를 근대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겠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의 밀접한 관계를 “고대의 정서”를 근거로 입증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여기서 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비극 예술의 반대자로서 비극을 보러 가지는 않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새 작품이 상연될 때면 항상 ‘관객석’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는 에우리피데스의 '두 사람의 관객' 중에서 두 번째 관객이었다. 또 첫 번째 관객은 에우리피데스 그 자신 이었다.

더 유명한 사실은 ‘델포이 신탁’에 두 이름이 나란히 씌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인간’으로 기록했고 에우리피데스는 지혜의 경쟁에서 이등상을 받을 만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세 번째로는 소포클레스가 거명된다. 소포클레스는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며, 아이스킬로스에게 자랑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이 동시대의 세 지자知者로 불리게 된 공통점은 분명히 이러한 ‘지식의 명확성’의 정도다.





<단지 본능에 의해>


지식과 통찰에 대한 전례 없는 존중을 가장 예리한 말로 표현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가 대정치가 연설가, 시인, 예술가들과 비판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아테네 시가를 두루 돌아다니던 바로 그때였다.

소크라테스는 곳곳에서 ‘지식의 환상’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예리한 말로 표현했다. 소크라테스는 놀라움에 가득 찼다. 왜냐하면, 모든 유명인사가 소명받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정확하고 확실한 인식이 없이, 그 일을 단지 본능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본능에 의해”라는 이 말은 소크라테스적 경향의 심장부를 건드릴 수 있는 표현이다. * ‘본능’은 바로 감성이며 그 사람의 내면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예술 또는 한 사람의 재능도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본능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현대에서 보자면 모두 자기 재능을 계발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성적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에게서 발현되는 것에 대해 그 자신도 어느 정도 따라가게 되어 있다.


니체가 예시를 든 이러한 형태는, 유명한 “대정치가 연설가, 시인, 예술가들” 더욱더 그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훈련받고 갈고닦은 것은 재능이 그쪽으로 있기에 더욱더 매진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유명해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본능과 이성을 대립시킨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 자신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감정이 없다면 과연 무작정 극복될 수 있을까? 본능이 실존이며 고통이다. 그 고통을 극복하는 힘도 본능에 의한 것이다. 이성은 거들뿐. 이 고통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찾아서 이성은 해결할 뿐. 본능이 먼저고 이성이 나중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로 기존의 예술이나 윤리 모두를 비판했다. 그가 검토의 눈길을 보내는 곳마다 통찰 부족과 망상의 권세가 눈에 띄었다. 그는 이런 ‘부족 현상’으로부터 ‘기존의 것’은 내적으로 전도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배척해야 한다는 결론을 끄집어낸다.


바로 이 한 가지 문제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존재를 수정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한 개인’에 불과한 그는 경멸과 우월의 표정을 동시에 지으면서 전혀 다른 방식의 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즉 예술과 도덕의 선구자로서 하나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 옷자락을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생각할 그런 세계 속으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가장 큰 의혹거리다. 이 의혹거리는, 소크라테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항상 되풀이해서 ‘고대의 이 기이한 현상’의 ‘의미와 목적’을 인식하라고 자극한다. 그런데 과연 호메로스, 판다로스와 아이스킬로스, 피디아스, 페리클레스, 피티아와 디오니소스로서, 가장 깊은 심연과 가장 깊은 정상으로서 우리의 ‘경탄과 숭배의 대상’이 분명한 “그리스적 본질”을 ‘한 개인’으로서 감히 ‘부정’하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여기서 이 사람은 당연히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여기서 그리스의 본질은 모두 디오니소스와 결합하면서 진행되어 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본질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제외시키면 그리스적 본질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일 거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지금 그것을 제외시킨 것이다.


인류 가운데 가장 고귀한 자들의 '영적 합창단'에게,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반신半神’은 도대체 누구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네가 그 아름다운 세계를 억센 주먹으로 부셨구나. 세계는 무너지고 세계는 허물어지는구나!”


소크라테스




<그리스적 본질과 정반대의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마신魔神)”이라 불리는 저 기인한 현상이 소크라테스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위대한 오성이 흔들리는 어떤 특별한 상태에서 그 순간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로 확고한 발판을 얻는다. 이 못소리는 들릴 때마다 항상 '경고'한다.


‘본능적인 지혜’는 이렇게 완전히 비정상적인 인물에게 나타나되, 여기저기서 훼방을 놓으며 ‘의식적 인식’에 맞서기 위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생산적인 인간’에게 “본능”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힘’이 되며, “의식”은 ‘비판적’이고 ‘경고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 본능은 ‘비판자’가 되고, 의식은 ‘창조자’가 된다. 정말 결함으로 태어난 괴물이 아닌가!

*정리해 보자면,

* 비정상적인 인물의 본능적인 지혜 ->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 -> 본능/비판자, 의식/창조자

* 모든 생산적인 인간 -> 본능/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힘, 의식/비판적인고 경고적인 태도를 취함.

=> 그러므로 서로 정반대로 뒤집어져 있다는 것. 소크라테스에게 본능은 비판자의 기능만을 한다는 것임.

* 다이몬은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의 신화, 종교, 철학에 등장하는 인간과 신들 중간에 위치하거나, 죽은 영웅의 영혼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이몬은 "모든 종류의 영혼"에 가깝고, 한국어로는 귀신, 악령, 정령 등으로 번역된다. 이는 훗날 기독교 문명권에서 "데몬"으로 악령으로 여겨지게 된다.
* 오성은 칸트 철학에서 감성과 이성과 구별되는 지력으로, 분별력과 이해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성과 오성은 감성과 구별되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말한다. 이성은 사유능력으로 감각적 인식능력에 대비되며, 진위와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오성은 감성의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낳지만 이성은 오류를 낳는다고 한다. 이성과 오성은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유하는 것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이성'이라고 한다.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한다.
사유와 학습을 통해 습득한 정보에 따라 알고 모름을 인식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한다.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야성'이라고 한다.
어떠한 현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느낌의 것을 '감성'이라고 한다.
<출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

이성, 오성, 지성, 야성, 그리고 감성...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소크라테스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가다/ 법정 모독죄를 유도하다>


이제 여기서 모든 ‘신비주의적 성향의 기형적 결함’을 인식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특별한 ‘비非신비주의자’, 즉 ‘논리적 천성’이 과도하게 발달할 비신비주의자처럼, ‘본능적 지혜’가 지나치게 발달해 있는 ‘비신비주의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크라테스에게 나타나는 ‘논리적 충동’은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거침없는 충동’의 흐름 속에서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를 전율케 하는 그런 거대한 ‘본능적 힘’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의 힘이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향이 지녔던 ‘신적인 소박성’과 ‘확실성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사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논리적 소크라테스주의’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소크라테스의 뒤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 그것은 마치 ‘그림자’를 통하듯이 소크라테스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스스로 이런 상황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신적인 소명’을 도처에서 드러냈다는 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재판관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주장할 때 취했던 ‘그런 품위 있고 진지한 태도’에서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이런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는 것은 ‘본능을 해체’하는 그의 영향을 용인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법정에서의 소크라테스의 태도, 이 태도가 그리스 법정을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국가의 법정 앞에 불려 나갔을 때, 이런 ‘풀 수 없는 갈등 상황’에서 유일하게 내릴 수 있는 선고 형태는 “추방”이었다. 법정 선고가 어떤 후세 사람에게도 아테네 인들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책망한 권리를 주지 않으면서 소크라테스를 추방할 수 있는 길은, 그를 수수께끼 같은 사람,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람, 해명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죽음에 대한 어떤 공포도 없이 명철한 정신으로 단순한 추방이 아닌, “사형선고”가 자신에게 내려지도록 상황을 끌고 나갔던 것 같다. 그는 죽음으로 걸어갔다. 플라톤의 묘사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먼동이 트는 새벽에 새날을 시작하기 위해 마지막 주객으로서 연회장을 떠나듯이 그렇게 침착하게 죽음으로 걸어갔다. * 그리스인의 본질은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호메로스적이고 아폴론적 그리스인들은 피안보다 차안의 삶을 원했다.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들은 예술적 삶을 원했다. 결국 삶의 지속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어떤 공포도 없이 죽음으로 걸어갔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법정을 모독하여 '법정 모독 죄'를 만들어서 죽었다. 어쩌면 그의 이런 태도가 그 당시 그리스인들을 더 비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화' 되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동안의 그리스인들과는 달랐다. 어찌 보면 정반대였다. 니체는 그래서 ‘괴물’이라고 말한 것일 거다. 여기에 그리스 청년들이 동조를 한 것이고, “이상적”이라는 것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뒤로는 연회의 동료들이 진정한 연애 시인인 소크라테스에 관한 ‘꿈을 꾸면서 의자 위나 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 생각난다. 그 그림의 색상과 늘어진 시계, 기이하게 왜곡된 하얀 형체, 감고 있는 눈 같기도 하고 얼핏 말의 형상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말은 또 아니다. 유령 같기도 하고 바람에 해진 커튼 같기도 하고, 시간 속에서 변형된 피부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억의 지속’은 ‘시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달리는 시간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였는지도. 나는 니체의 이 문장에서 ‘오랜 시간의 모습’이라고 감상한다. 시간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죽음에 임한 소크라테스는 고귀한 그리스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이상’,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청년의 전형인 플라톤이 자신의 몽상가적 영혼을 열렬히 헌신하면서 이 이상적 모습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 플라톤이 이원론을 만든 이유는, 소크라테스를 옹호하기 위해서였을까? 예술을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근원의 일자를 ‘이데아’라 하고 예술을 모방의 모방이라고 한 것도 결국은 모두 ‘모방’에 가깝다. 그것은 바로 ‘디오니소스 예술의 원리’를 모방한 것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따지면 결국 플라톤은 스승에게서 잘못 배운 것이다. 또 그리 따지면 소크라테스가 잘못 가르친 셈이 된다.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비극’을 그리스적 본질에서 제외시켰다. 플라톤이 이원론을 들고 나온 이유는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분리시킨 것을 봉합하려 함이었을까? 하지만 플라톤은 ‘그리스적 본질’을 봉합하지 못했다. 그럴 수도 없다. 비극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것을 플라톤에게 알려줄 이들도 없다.


또한 그리스적 본질을 되살려내면 소크라테스를 두 번 죽이는 셈이 된다.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원론을 계속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은 유일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쩌면 디오니소스적 예술이 지배적인 그리스 사회에 염증이 났을 수도 있다. 모두가 예술만 하고 살 수도 없고, 모두 거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러한 필연적인 과정들은 모두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러니 소포클레스가 더 생각난다.



아카데미아(Akadēm(e)íā)플라톤 시대의 아카데메이아를 그린 모자이크화
*아카데미아(Akadēm(e)íā)/ BC 387년경 플라톤은 철학과 과학의 교육·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했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에만 제한하지 않고,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해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여기서 그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시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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